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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성 Nov 02. 2024

2일. 후회하는 이유

엊저녁 심심해서 괴로웠다. 퇴사하고 나서 할 일을 퇴근할 시간이 되기 전에 끝낸 탓에 더 할 게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또 다른 일을 벌이기엔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퇴사하지 말걸’

그렇게 생각한 적도 여러 번 있다. 엊저녁은 아니다. 퇴사를 하겠다고 말하고 나서부터 가끔 가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작게나마 고민했으나 사무실로 돌아가면 고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지금도 후회하진 않는다. 그저 퇴사하고 나서 할 일을 많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이직하는 게 아니라면 퇴사를 다시 생각해 보라는 조언이 떠오른다.

이직, 생각, 조언. 후회?


단언컨대 후회할 일은 없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떤지 알았고 그것을 더 버텨내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후회 비슷한 감정과 생각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그 상황에 처한 주체를 ‘나’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상상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더 다니는 게 맞다. 나와 함께 입사한 동기들도 모두 힘들다고 말하며 나보다 더 회사를 싫어하지만 묵묵히 회사를 다니고 있으니까 그것이 옳다는 건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가 더는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일을 그만뒀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째서 후회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람이 후회하는 이유는 뭘까. 지금보다 어릴 적에 나는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진 못했으나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자랑스레 말하곤 했다. “왜냐면 그때 당시 나에겐 그게 최선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게 정말 맞는지 의문이 든다.

어떤 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상식이 눈을 뜬다. 그 상황에 처한 사람, 즉 ‘나’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했는지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그때 당시의 누군가를 가정해서 상상한다. 그렇게 생각하여 상식에 어긋나는 판단을 했다면 후회한다.

회사를 다닐 적에 상사가 화면을 가리키며 물었다. “정확해요?” 나는 답했다. “정확할 겁니다.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자 상사가 답했다, “최선은 중요하지 않아요. 대충 해도 정확한 게 중요해요.” 결국 나는 정확하다고 말했다. 내가 뭐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값이 달라지지는 않아도 그렇게 말했다. 후회하는 이유도 그와 비슷한 게 아닐까?


인간은 자기 자신밖에 경험하지 못한다. 그마저도 그 순간에 처한 자기 자신만 겪을 수 있다. 젊은 ‘나’와 늙은 ‘나’가 함께 있을 순 없다. 그리고 ‘나’가 다른 누군가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은 상식, 다시 말해 ‘제삼자의 눈’으로 나를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퇴사한 지 고작 이틀이 지났고, 아직까진 퇴사를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빠져나간 힘이 돌아오고 내가 상식을 생각할 만한 지경에 다다르면, 어쩌면 퇴사를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나는 지금부터 열심히 살아야 한다. 살면서 여러 가지 상식에 어긋나는 선택을 해봤고, 그래서 잘 안다.

어떤 선택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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