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이야기를 원한다. 자기를 뭐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스스로를 설명하고 싶어 한다. 특히 퇴사하는 사람은 그렇다. 사직서엔 ‘일신 상의 사유’라고 적겠지만, 누군가의 얼굴에 대고 그렇게 이야기할 순 없다.
그렇다면 내가 그만둔 이유는 뭘까. 월급이 적어서? 상사와 싸움이 있었기 때문에? 괴롭힘을 당해서? 모두 아니다. 그냥 힘들어서 그만뒀다. 왜 힘들었는지 구태여 묻는다면, 일이 많아서 힘들었다고 답하겠다. 난 정말 힘들어서 그만뒀다. 일이 많아서 그만뒀다. 솔직하게 그랬다.
누군가는 그걸 버티면 경험이 된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어딜 가나 이만큼 일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만두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진 않는다. 힘든데 어떻게 더 버티는가. 뛸 수 없는 사람에게 조금만 더 뛰라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체력을 기른다는 마음으로 조금만 더 버티면 어떨까. 두 달만 더 다니면 계약 종료니까 조금만 더 버텨 보라고. 원래 젊을 적엔 버티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젊은이에게 젊음이 있는 이유라고.
내가 말도 안 되는 고집쟁이라 이렇게 말하는 걸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생은 사는 것이지, 버티는 게 아니다. 버텨야 할 때가 있는 건 맞다. 조금만 더 버티면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면, 예를 들어 유명한 실험에서 그랬듯 마시멜로를 하나 더 먹을 수 있다면, 그러면 버티는 게 맞겠지만, 인생과 실험은 다르다.
모든 인간을 한 가지 잣대로 평가하는 건 위험하다 못해 어리석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라고 할지라도 누군가에겐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는 사실은 모두 알지만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이야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퇴사한 젊은이에게 인내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 인내심이 없으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하는 사람 생각이지만, 그것이 마치 진리인 양 떠들 수 있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믿기 때문이다. 마치 종교나 정치인을 믿듯이 그렇다.
그럴싸한 이유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너무 유치하게 여겨질 따름이다. 난 그저 퇴사했을 따름이다. 일이 많아 힘들어서 퇴사했다. 거기에 대고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싶지 않다. 어느 순간 퇴사를 결심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회사가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느낀 그대로를 이야기하고 싶다. 이야기가 아니라 느낌을 말하고 싶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느끼고 깨닫는 바를 소곤소곤 말하고 싶다.
내 자리에서 오른쪽 벽을 보면 시계가 걸려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시간을 볼 수 있고, 보고 있다. 지금쯤 회사에서 어떤 일이 있을지 나도 모르게 상상한다. 그럴 때마다 안도감을 느끼거나 그러진 않는다. “그만두길 잘했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쯤이면 점심을 기다리고 있을 테지 하고 생각할 뿐이다.
어쩌면 퇴사는 그저 어떤 생활양식을 포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지 않고 다르게 살겠다고 선언하는 바인지도 모른다.
한번에 두 개의 삶을 살 수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