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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성 Nov 04. 2024

4일. 늦은 아침

정오에 깼다. 그만두지 않았다면 출근해서 점심을 먹을 시간. 바로 그 시간에 잠에서 깼다.

힘들어서 회사를 그만뒀다. 그만두고 나면 체력이 찰 줄 알았는데 어떤 면에선 다닐 때보다도 더 체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느낀다.

스트레스를 아주 많이 받는 환경에서 스트레스가 거의 없는 환경에 오니까 나쁜 점이 있다. 그중 하나가 억지로 스트레스를 받고자 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스트레스받는 상상을 한다. 오죽하면 5년 전에 만난 대학교 룸메이트를 저주하는 상상까지 했을까. 그렇다면 상상하지 말고 스트레스를 줄 만한 환경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예를 들면 운동을 한다거나, 글을 많이 쓴다거나 한다면? 그런데 정작 그럴 만한 체력은 없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변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다고 믿고 싶은데 몸은 그렇지 않다. 나는 어딘가 망가진 것 같다.


멀쩡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다들 문제를 하나쯤 갖고 산다. 마치 문제가 없으면 죽는 것처럼 그렇게들 산다. 그렇다고 해서 위안이 되진 않는다. 조금도 기쁘지 않고 더 우울할 따름이다. 왜냐면 모든 사람이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저마다 자기 삶을 살기 바쁘다면, 도움을 받을 사람이 있을까 하는 우울한 생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건 핑계다.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많고, 내가 도울 수 있는 사람도 많다. 내가 받으려 하지 않고, 주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정말 변명이었으면 좋겠고, 정말 핑계이기를 바란다. 내가 잘 살 수 있다고 스스로 믿고 싶다.


살면서 누군가를 부러워한 적이 거의 없다. 대학교를 다닐 때, 한강 작가가 맨부커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강 작가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말해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그때 말곤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부러워한 적이 없다. 오늘 야생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야생화는 바람에 따라 흩날리고 있었다. 예쁘지도 않고 몹시 가냘파 보였지만 그냥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해가 뜨면 햇빛을 받고 해가 지면 죽은 듯이 살고. 어차피 내일도 해가 뜰 테니까. 그러다가 태풍이 몰아치거나 강아지가 나를 집어삼키면 어쩔 수 없이 죽는 것이다. 그보다 더 완벽한 삶이 있을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두 가지다. 사랑과 희망. 둘 중 하나만 있어도 사람을 살아갈 수 있다. 두 개가 모두 없다고 해서 죽는 건 아니다. 사람답게 살아가기 어려울 뿐이다.

야생화를 부러워하는 사람에게 그럴싸한 말을 듣고 싶다면, 차라리 꽃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게 낫지 않을까. 야생화는 흔들리며 말하고 있다. 어떤 언어도 하지 못하지만 말하고 있다. 분명히 뭐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듣지 못할 따름이다.


만약에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이런 상상은 하지 않았을 터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이 더 나답다고 느낀다. 나는 본디 이런 사람이다. 야생화를 부러워하는 사람. 남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 어쩌면 이해할 수 없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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