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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성 Nov 01. 2024

1일. 지난달 달력

지난달 달력을 본다. 뜯기지 않은 날들이 벽에 걸려 있다. 출근하기에 바빠서 차마 보지 못했던 달력과 얼마간 눈을 마주하 따뜻한 차를 마신다.


사직원을 내러 갔다. 입사할 때 보고 나서 마땅히 마주칠 일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말을 걸려고 하니 퍽 낯설었다. 회사를 넉 달간 다녔으나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더는 알 일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흔히 하는 말로 어머니뻘, 또는 아버지뻘이라고 부를 만한 분들이 사직원을 받아들이며 넌지시 말을 걸었다. 고작 두 달 남았는데 버텨 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었다. 정확히 말해 ‘재고’ 해 봐라, 다시 생각해 봐라, 라는 말이었다.

그때 당시 나를 뒤흔든 말은 ‘경험’이었다. 어딜 가나 이곳과 비슷하니 두 달간 경험한 다면, 그것이 분명 나중에 도움이 될 것이다, 라는 말이다. 월급을 더는 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다다랐을 때보다도 더 흔들렸다.

그러나 뜯기지 않은 달력을 보고 있는 지금. 경험이라고 하니 무엇을 더 경험할까 싶다.


목이 부을 대로 부어서 말조차 제대로 하기 어려운데 일이 많아서 야근해야 했던 날이 경험이라고 하면 백 번이고 고개를 가로젓겠다. 침을 넘기면 목이 타오를 듯 따가울 지경인데 일을 해야 했던 그때가 경험이라고 한다면, 아마 십 년쯤 지난 후에, 그만큼 늙고 나서 나보다 열 살은 어린 후배에게 “나도 그렇게 일했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경험이라고 한다면 굳이 만들고 싶지 않다.     

“사람들은 늙을 때 누릴 애매한 자유를 위해 좋은 날을 일하며 보낸다.” 소로우가 <월든>에서 한 이야기다. 나에게 뭐라고 조언하는 사람은 나보다 늙었다. 한참 늙었다. 늙었다고 해서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들과 내가 무엇을 두고 공감할 만한 시간대가 그만큼 벌어졌다는 뜻이다.

세상은 계속해서 바뀌고 있고, 지나간 세상과 다가올 세상, 그리고 지금 세상을 무슨무슨 ‘시대’라고 부른다. 나와 다른 시대를 산 사람과 내 시대를 살고 있는 나는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들이 하는 말이 틀린 건 아니고, 그분들이 나를 꼬드겨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기엔 우리가 너무나도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다.


어쩌면 시대 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롯이 내 탓일 수도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이 잘못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뜻을 거두고 싶진 않다. 잘못됐다고 하더라도 그런대로 살아야 한다고 본다. 소로 태어났다면 소로 살아야지, 말로 살 순 없는 노릇이니까.


나는 내 인생이란 짐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나 또는 내가 짊어지고 있는 인생을 뭐라고 말하든 그것은 내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것이고, 나만이 짊어질 수 있는 것이다.


찢기지 않은 달력을 보고 나를 모르는 상사가 한 말이 갑자기 왜 떠올랐을까.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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