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달력을 본다. 뜯기지 않은 날들이 벽에 걸려 있다. 출근하기에 바빠서 차마 보지 못했던 달력과 얼마간 눈을 마주하며 따뜻한 차를 마신다.
사직원을 내러 갔다. 입사할 때 보고 나서 마땅히 마주칠 일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말을 걸려고 하니 퍽 낯설었다. 회사를 넉 달간 다녔으나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더는 알 일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흔히 하는 말로 어머니뻘, 또는 아버지뻘이라고 부를 만한 분들이 사직원을 받아들이며 넌지시 말을 걸었다. 고작 두 달 남았는데 버텨 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었다. 정확히 말해 ‘재고’ 해 봐라, 다시 생각해 봐라, 라는 말이었다.
그때 당시 나를 뒤흔든 말은 ‘경험’이었다. 어딜 가나 이곳과 비슷하니 두 달간 경험한 다면, 그것이 분명 나중에 도움이 될 것이다, 라는 말이다. 월급을 더는 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다다랐을 때보다도 더 흔들렸다.
그러나 뜯기지 않은 달력을 보고 있는 지금. 경험이라고 하니 무엇을 더 경험할까 싶다.
목이 부을 대로 부어서 말조차 제대로 하기 어려운데 일이 많아서 야근해야 했던 날이 경험이라고 하면 백 번이고 고개를 가로젓겠다. 침을 넘기면 목이 타오를 듯 따가울 지경인데 일을 해야 했던 그때가 경험이라고 한다면, 아마 십 년쯤 지난 후에, 그만큼 늙고 나서 나보다 열 살은 어린 후배에게 “나도 그렇게 일했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경험이라고 한다면 굳이 만들고 싶지 않다.
“사람들은 늙을 때 누릴 애매한 자유를 위해 좋은 날을 일하며 보낸다.” 소로우가 <월든>에서 한 이야기다. 나에게 뭐라고 조언하는 사람은 나보다 늙었다. 한참 늙었다. 늙었다고 해서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들과 내가 무엇을 두고 공감할 만한 시간대가 그만큼 벌어졌다는 뜻이다.
세상은 계속해서 바뀌고 있고, 지나간 세상과 다가올 세상, 그리고 지금 세상을 무슨무슨 ‘시대’라고 부른다. 나와 다른 시대를 산 사람과 내 시대를 살고 있는 나는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들이 하는 말이 틀린 건 아니고, 그분들이 나를 꼬드겨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기엔 우리가 너무나도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다.
어쩌면 시대 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롯이 내 탓일 수도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이 잘못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뜻을 거두고 싶진 않다. 잘못됐다고 하더라도 그런대로 살아야 한다고 본다. 소로 태어났다면 소로 살아야지, 말로 살 순 없는 노릇이니까.
나는 내 인생이란 짐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나 또는 내가 짊어지고 있는 인생을 뭐라고 말하든 그것은 내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것이고, 나만이 짊어질 수 있는 것이다.
찢기지 않은 달력을 보고 나를 모르는 상사가 한 말이 갑자기 왜 떠올랐을까.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게 전부다.
Brunch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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