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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스크 환자의 나날 May 11. 2024

향일암

내려가는

 




 향일암을 내려가는 길은 조그만 뒷길을 지나게 되어있다. 사람들이 일렬로 서서 주춤거리면서 내려가는데, 신기하게 막히진 않았다. 빠르지 않지만 다들 수월하게 스윽 내려간다. 오히려 모두가 바쁘게 걷는 오르막길이 좀 더 더딘 기분이었다. 사진을 찍어서 그런가 하고 머리를 긁적인다. 올라오면서 본 것은 내려갈 땐 아무런 흥미도 주지 못하는 걸까. 무언가 아쉽다.


 좁은 길을 통과하면 넓은 시멘트 언덕길이 나온다. 차가 올라오기 쉽게 홈이 파져 있어, 하산하는 사람들의 모양새는 올라올 때보다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우둘두둘한 시멘트 바닥에 발을 높이 올리기 쉽지 않은 어르신들은 신발이 걸려, 끌리는 소리가 난다. 가끔 돌부리에 차여 휘청휘청하는 위험한 모습에 서로를 붙잡고 내려간다. 이것이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라는 향일암의 안배일까.

 옆이 시끌시끌하여 내려다보니, 반듯한 계단이 보이고 사람들이 향일암으로 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올라올 때도 그렇게 물고기 떼 같았는데 위에서 봤을 땐 형형색색의 점들이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로 굴러가는 것일까. 데구루루 웅성웅성


 다리 힘이 풀린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천천히 내려간다. 다행히 시멘트 바닥에 걸리진 않으셨지만 그래도 불안하셨는지 내게 손을 내미신다. 나는 손을 꽉 잡고 팔에 힘을 준다. 앞을 보니 대부분의 자식들은 팔 한쪽을 다 부모님께 내어드리고 있다. 그 모습들이 자못 비슷하여 웃음이 난다.

  이렇게 힘들게 올라가고 내려가는 그동안 신기하게도 불평불만의 큰 소리는 하나도 못 들은 것 같다. 향일암이 주는 알 수 없는 매력인 걸까. 보통 이런 곳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억지로 가족에게 끌려 온 사람도 있을 텐데 정말 큰 소리 없이 감탄으로 가득 찼던 곳은 내 기억 속엔 몇 없었다.

 언덕길을 쭉 내려오다가 오르막길과 연결되는 곳이 있었다. 계곡의 흐름처럼 물줄기가 맞부딪힌 곳 같았는데 올라오는 사람들은 자기가 서 있는 길 반대편 길이 내리막이라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오직 내려가는 사람들만 아 내가 왔던 이 길이 여기서도 만나는구나 알아차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르는 사람들은 거의 쭉 펼쳐진 남해 바다 쪽을 보고 있었기에 살짝 높은 데다 뒤에 나무로 가려져 있어 길이 있는 줄도 모를 것이다.


 모든 것을 마친 사람만이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서늘한 바닷바람이 밑에서부터 올라온다.

 회유웅.


 손이 따뜻하다. 어머니의 손을 제대로 잡아본 적이 언제 있었더라.

 보통의 아들들이 그렇겠지만, 부모의 손을 잡고 걸을 일은 어렸을 때 빼곤 딱히 없지 않을까.

 그땐 지금과는 반대로 조막만 한 아이가 넘어질까, 잃어버릴까, 한 손에 다 들어오는 말랑한 손을 붙잡고 기울이며 걸었을 것이다.

 아직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심정을 잘 모르지만, 아마 기쁨이겠지.

다만 어머니의 거친 손을 잡고 걷는 지금의 나는 어쭙잖은 먹먹함과 아쉬움을 느낀다. 이제 다리의 힘이 풀린 어머니는 과거 한 손으로 책장을 옮기는 사람이었는데.


 올라왔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이 내려갈 때도 마치 바닷속으로 들어가듯 밀려온다. 마지못해 숨겨두었던 것일까. 하지만 평소에 보았던 그 모습은 옛날과 지금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계절이 지남에 따라 살짝 감기가 심해지거나, 두통이 조금 더 생겼을 뿐이다. 멈춰 있는 곳에 서서는 변화를 볼 수 없었던 것일까. 나와 어머니 모두 옛날부터 시간과 추억을 차곡차곡 담던 우리 집의 벽지가 어느새 문득 돌아보니 누렇게 변했을 때에도 나도 어머니도 옛 그 시절 그대로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늙어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켜본다는 것은 너무나도 무딘 느낌이다. 액자에 담겨있는 나의 태권도 복이 마치 다른 사람의 아이를 보는 기분이 들 때, 이렇게 지나온 시간을 어머니는 어떻게 느낄까.


 어머니의 표정은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향일암을 다 보고 내려왔는데 지금이 제일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으셨다. 나도 따라서 웃는다.


 이제 완만한 내리막일 때 어머니는 슬그머니 잡았던 손을 빼시곤 내 허리를 툭툭 치신다. 고생했다고.


뒤를 돌아보니 앞서 보았던 내 모습과 같이 사람들이 다들 손을 잡고 내려온다. 나처럼 다들 먹먹함을 느낀 걸까. 다들 조마조마한 모습으로 최대한 당당하게 걷는 부모들의 팔을 단단하게 잡으며 내려온다. 부모님들의 표정은 밝았다.

 나는 살짝 어머니의 뒤를 따라 걷는다. 이제 시멘트보다 시커먼 아스팔트 길을 걸으니 아까보다 당차게 팔을 휘저으시며 걷는다. 파워 워킹! 건강, 건강! 추임새가 내려오는 동안의 적막을 깬다. 그리곤 돌아보시고 향일암에 올라갔다 와서 정말 좋았다. 고맙다 하신다. 그리곤 내리막을 걸을 때완 비교도 안 되는 빠르기로 내려가신다. 갓김치를 사시려나보다. 무리 속에 사라진 어머니, 그리고 내리막을 내려오는 무수한, 어머니들 아버지들.


 나는 언젠가 어떤 손을 잡고 다시 어떤 손을 잡고 내려올까. 무척이나 먹먹하지만 즐거운 기분으로 어머니의 뒤를 쫓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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