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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스크 환자의 나날 Apr 27. 2024

향일암

좌선대

 향일암의 등용문을 지나 올라오면 그리 크지 않은 절이 있다. 사람들은 마침내 도착한 이곳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풍경을 구경한다. 바다를 마주 보고 있는 불상의 시선 끝에 사람들의 시선도 모인다. 끝없는 바다와 구름 그리고 그 사이를 가른 수평선이 마치 저 너머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을 풍긴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계단을 하나둘 오른다. 마지막 남은 계단에서 우리는 살짝 난간을 손을 뻗어 들어온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오르는 등산객들의 머리를 쓱 훑는 것을 보았다. 신기한 곳이었다. 아름다운 절들을 다녀보아도 이렇게 나무와 가까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아닌가. 사실 잊는 것이 너무 많아 잘 모르겠다. 그냥 그 순간을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해탈문을 지나 오른 사람들이 찰나의 위안과 안도를 느끼는 순간처럼 보였다.

 나는 담장에 기대어 괜히 흙바닥을 툭툭 비비며, 대웅전 앞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수군거리고 돌아다니는 관광객들의 모습을 구경한다. 어머니는 담장에 기대어 저 멀리까지 펼쳐져 있는 바다를 보신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조용한 음성으로 좋다고만 반복하시다가, 결국엔 말없이 아름다운 남해의 풍경을 눈으로 담으신다.

 적막

 주변의 떠드는, 움직이는, 모든 소리를 멀어지게 만드는 개인의 침묵을 나는 가족으로서 몰래 빌려온다. 높지만은 않았던 산이지만 간단한 운동을 하지 않던 몸이라, 오히려 목적했던 곳에 도착하자 둘 다 말이 없어진 것이다.

 향일암의 시원한 바닷바람이 끊임없이 헉헉거리는 폐를 다시 가득 채우고, 이마에 작게 맺힌 땀방울도 흔적도 없이 말리고 나서야 우리는 허리를 펴고 제대로 설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간다면 체력을 기르기 위해 운동하리라 다짐하면서 어머니에게 괜찮으신지 여쭤보았다. 어머니는 바다를 말없이 응시하시다 손으로 옷매무새를 툭툭 치며 정리하셨다.


  "올라 오길 잘했다. 뿌듯하네!"


 땀에 절여져 어머니의 머리카락이 두껍게 뭉쳐져 있다. 그 사이사이 잔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어 옴짝달싹 못하고, 아직 젖지 않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하늘로 손을 뻗으며 흩날린다. 그 사이 아직 마르지 못한 땀방울들이 빛으로 반짝거린다. 이마를 지나는 붉은 손수건, 땀들의 빛은 검게 면을 적시며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다. 손수건이 한 번 두 번 움직일 때마다, 화장도 조금씩 지워진다.

 

 그렇게 한숨 돌리고 돌아보니 대웅전 옆으로 작은 길이 있었다. 작은 팻말엔 원효대사 좌선대 가는 길이라고 적혀있다.

 

 "오, 여기에서 원효대사가 좌선했나 봐."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왔기에, 사실 향일암이 유명한 절인지도 또 원효대사가 머물렀는지도 몰랐다. 그저 풍경이 좋은 암자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이렇게 놀라운 곳이라니.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니 동굴이 있었다. 폭이 좁아 올라가는 사람과 내려오는 사람들이 얽혀있긴 했지만, 서로 멈춰주고 양보하니 큰 불편함 없이 올라갔다. 어머니는 내 뒤에서 조용하 목소리로 말하셨다.


 "지하철도 이렇게 양보하면 아주 좋을 텐데 말이지."

 

 나는 차례를 기다리며 살짝 턱을 긁고 말했다.


 "지하철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그런가 보지."

 "어떻게 지하철이 중요하지 않니, 매일 그걸 타고 출근하면서 돈을 버는데."

 "그런가."

머쓱해서 머리를 긁는다. 가끔 이런 반박을 들으면 참 할 말이 없다.

 "아잇 대화를 할 줄 모르네!"

 "그것은 대화를 하기엔 쓸모없는 내용이기 때문이지."

냉철하게 말씀하신다. 나는 살짝 기분이 상한다. 둘은 처음 만난 사람처럼 동굴을 올라가는 차례를 기다린다.


 비좁은 동굴을 빠져나와 조금 더 언덕을 오르니 밑에 있는 불전들보다 더 작은 암자 하나가 있었다. 그곳은 밑에 보다 더 조용했다. 바닷바람이 조금 세게 불지만, 사람들은 말없이 좌선대를 쓱 쳐다보고 관세음보살상을 쓱 바라보고 내려간다. 우리는 조용히 좌선대를 본다.


 좌선대 밑으로는 파도가 친다. 산중턱이라 조금 높긴 해도,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쏴아 하고 밀려와 부딪히고 철썩하면서 부서지고 푸르렀다가 하얗게 비산 했다가, 그리고 다시 파랗게 되돌아간다.


 대사는 이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며 좌선했을까. 나는 감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를 상상해 본다. 그때엔 관광객도 없었겠지. 다만, 좌선의 공간만큼은 여기까지 이어지니, 그 흔적이나마 느껴보고 싶었다. 바람과 파도, 산과 그리고 남해 바다의 섬들이 보이는 이곳. 파도소리가 퍼지지만 이 공간 전반에 깔려있는 것은 바로 적막함이었다.


 난 적막이 좋다.

 그것은 사람을 홀로 있을 수 있게 만드는 마법이다. 즐거웠다. 좌선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경험을 통해 천천히 나를 뒤돌아 볼 수 있는 기회는 얻을 수 있다.

 어렸을 적 보았던 태안의 바다를 떠올려본다.

태안반도 어디에서인가, 검은 바위 위에서 어린 내가 긴 나무 막대기를 가지고, 마치 바다와 대적하는 무엇인 것처럼 서 있는 모습을 어머니가 사진 찍었던 기억이 있다. 그 어린 시절의 나는 바다를 마주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사진이 있었기에 그랬었던 일이 있었구나 하는 것이지. 지금의 나도 바다를 보며 과거를 천천히 생각하는데, 12살 먹었을 때의 나도 그 짧은 과거를 돌아보고 있었을까? 어머니는 그런 나를 바라보고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정말 잘 싸우기도 하고, 재미있게 투닥거리며 지낸 나의 가족 나의 어머니는 과연 적막을 어떻게 느끼고 계실까. 그때처럼 감상에 잠긴 아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까?


 아니다 어머니는 향초를 사고 계셨다. 그리고 그 향초의 겉에 만사형통과 가족이 화목하고 아프지 않기를 기원하며 매직으로 적고 계신다. 지금 당장 내가 느끼는 이 고양감을 어머니는 알 수 있을까, 아니다 아마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보다 똑똑하시니. 아닌가 그러면서도 아직도 약간, 구석 어딘가에 박혀있는 소녀 감성으로 알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저 망망대해를 나와 관세음보살과, 그리고 그 앞에 향초를 켜고 내 옆에 선 어머니가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솨아- 소리와 함께

 우리는 바다로 물러나는 파도와 함께 천천히 이끌려간다. 저 멀리 회오리 치는 물소리가 여기 귀까지 들린다. 아닌가, 상상인가 하지만 휘오와 하며 굽이치는 그 모습은 바로 눈앞에 있다가도 저 멀리 사라진다. 알 수 없다.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공간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다. 그냥 이 조용함 속에 우리는 바짝 주던 힘을 풀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눈을 감으면 파도가 저 밑에서부터 여기까지 소용돌이친다. 소리가 들린다. 파도는 과거를 천천히 부수다가도 서둘러 산 정상까지 올라간다. 흔들리는 나뭇잎들, 나뭇가지들, 그 사이로 파도가 바람처럼 빠져나간다, 쏴아 소리와 함께. 이제 혼자 남아 다시 물러가는 파도 소리에 빠진다. 이제 옆엔 아무도 없는 것 같이 느껴졌다. 다시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파도를 부른다. 올라오는 파도, 온몸을 비틀며 올라온다.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 한번 적막을 느꼈을 때, 그제야 이 향일암에 속한 자연스러운 무엇인가가 된 기분이었다. 이 아름다움 속에 파묻힐 수 있는 작은 존재가 되고 나서야, 해탈문을 지나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온 보람을 느꼈다. 좌선이 주는 알 수 없지만, 그저 나와 어머니는 점점 작아져 생각 없는 돌이, 기와 하나, 누워 있는 나뭇잎 하나가 되었다. 바람이 휘익 불면 이리저리 날아가는 나뭇잎이 되었다.  


 이윽고 아주머니 한 무리가 올라왔을 때 상념에 빠져나온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머 여기가 그 원효대사가 있었던 곳인가 봐 하면서,

 우리도 따라 해 본다.

 "엄마 여기가 그 원효대사가 있었던 곳인가 봐."

 "그러게 정말 경치 좋은데 계셨네."

 "춥지 않아? 바람이 엄청 부는데."

 "조금, 이제 내려가야겠네."


 암자의 돌계단 앞에서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조심히 내려가세요. 무릎도가니 다 나가겠어."

 "너나 조심해."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올라왔던 작은 길을 내려간다.

이렇게 작아지고 나서야 우리는 조금 더 가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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