려원 씨와 려원 씨의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우리 엄마를 생각했다.
기억 속 저편으로 치워 놓은 - 세월과 감정의 실타래들이 내 앞에 놓이는 것 같았다.
아픈 둘째 아이를 두고, 떠난 아이가 사무쳐 셋째를 낳으려는 려원 씨.
교통사고로 장애를 가지게 된 첫째 동생을 두고, 늦둥이 막내를 낳았던 우리 엄마.
그리고 지금도, 동생에게 메여 입원한 나에게 와보지 못하는 우리 엄마.
몇 년을 동생과 병원에 있었던 우리 엄마와 엄마가 그리웠던 어린 시절의 나.
뱃속의 둘째를 지키느라 첫째를 떼어놓고 입원 중인 나.
려원 씨의 가족이 가고, 그 밤이 지나도록 나는 풀지 못한 실타래를 들고 답도 없는 상념에 잠겼다.
이해는 하면서도 엄마에게 원망의 마음이 없을 리 없었다. 자라는 내내 야속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또한 내 딸에게 미안했다. 너를 두고 온 것이.
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던 엄마의 심정이 이해도 되었다.
애가 탔겠지. 안쓰럽겠지.
지금 나처럼
그렇지만, 엄마와 달리 나는 길지 않을 거라고. 둘째가 무사히 태어난다면 너희에게 똑같이 나를 내어 주리라 다짐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출근을 앞둔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 혹시 집에 아림이 해열제 있어요?]
아이가 열이 나는데, 해열제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자기 집에 상비약이 어디인지 모르다니 다소 어이가 없다가도 아이에게 약을 먹이는 것은 항상 내 일이었으므로 아이 아빠가 모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식탁 옆 수납장 위칸에 있잖아요. 열어보면 흰색 바구니 있어요. 그 안에 봐봐요. 열 많이 나요?]
[바구니? 아 여기 있네. 아침에 일어났는데 38.4 네요. 콧물이나 감기는 없는데]
[빨간색 해열제부터 먹여보고 두 시간 지나도록 열이 안 떨어지면 보라색 한 번 더 먹여요.]
아림이가 기초체온이 높고, 목감기에 걸리면 종종 열이 나기 때문에 다소 걱정은 될지라도 큰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열은 흔하지 않은가.
이러저러한 지시 사항을 당부해 두고 전화를 끊었다. 혹시 싶어서 지역 맘카페에 최근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병이 있는지 확인해 봐도 특별한 것은 없었다. 다만 하루하루 다르게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을 뿐.
설마 코로나는 아니겠지.
걱정해도 답도 없는 것을. 애 서 걱정을 떨쳐 버렸다.
오늘은 615호에는 특별한 일이 있는 날이었다. 우리 중 가장 오래된 입원자인 아중 씨가 드디어 '실'을 푸는 날이었다. 열린 자궁경부를 묶어(실상은 꿰매는 것에 가까운 것 같다) 놓은 실을 제거하는 것이다.
아중씨의 아기 꼼꼼이는 이제 36주 2일이었다. 나는 부러움과 진심 어린 축하를 담아 진료실로 가는 그녀를 응원해 주었다.
잠시 후 진료를 보고 온 아중씨의 손에는 곱게 접힌 하얀 티슈가 들려 있었다. 티슈 위에는 끊어진 하늘색의 끈이 보였다. 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튼튼한 그 푸른색의 끈 - 석 달 동안 아중씨의 아기 꼼꼼이를 지켜온 고마운 실이었다. 아중씨는 1번 침상에 걸터앉아 한참을 말없이 실을 들여다보았다. 우리도 가서 실을 실을 구경했다.
아중씨는 실을 구경하고 있는 우리에게 3일 뒤인 6일에 제왕절개 날짜를 잡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어? 잠깐만, 왜 이렇게 빨리? 자연분만 안 하고 수술한다고?"
꼼꼼이는 아직 36주 2일이었다. 3일이 지나도 36주 5일. 조산이다. 36주면 폐 성숙이 거의 완성될 시기이긴 해도, 완전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양수가 부족해서, 애가 더 안 크고 있데요."
아중씨가 먹신처럼 먹기 시작한 후로, 양수도 늘었고 태아의 체중도 다소 늘어났지만 양수과소증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에서 더 이상 늘지 않았고, 막달에 이르러 쑥쑥 자라야 할 태아가 공간 부족으로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꼼꼼이는 36주임에도 체중이 2kg을 겨우 넘긴 채 더 늘지 않았다. 병원은 태 내에서 성장이 지연되는 것보다 출산을 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한 듯했다. 저체중태아에다가 태아의 자세도 다리가 아래로 향해 있는 역아(逆兒)였기 때문에 제왕절개를 하기로 했다 한다.
날짜는 잡혔다. 우리가 바라는 최상은 아닐지라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첫째를 출산해 본 경험을 떠올려 아중씨를 위로했다.
"초음파 오차가 있어서, 꼼꼼이 생각보다 클 거야. 나는 초음파로 3.8kg였는데, 낳아보니 4.3kg이었어. 걱정 마."
실화다.
아중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나냐며 놀라워했다. 효진 씨도 실제로 낳아보니 초음파보다 많이 나갔다며 말을 보탰다.
우리의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겠느냐마는 아중씨는 웃으며 꼼꼼이도 그랬으며 좋겠다고 했다.
"1번 언니. 나 나가면 언니가 내 자리로 와요. 4번 언니는 곧 나갈 거니까 걱정 없지만, 1번 언니는 나만큼 오래 있을 텐데, 창문으로라도 햇빛을 좀 쬐어야 버틸 수 있어요."
이 방의 눕신이 되기까지, 몇 달을 2번 자리에서 누워 지낸 아중씨다.
"나도 36주까지 버틸 수 있을까?"
지금 26주인데, 감히 36주는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가 않았다.
"그럼요. 언니는 분명히 버틸 수 있어요."
아중씨가 확신을 담아 말해주었다.
그것이 구체적 근거가 있는 믿음은 아닐지라도, 내게 희망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고맙다는 말과 그 외의 몇 마디가 더 오갈 때쯤, 내 휴대전화가 나를 찾았다.
시어머니로부터 걸려 온 영상통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