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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4)

by Merry Christmas

려원 씨는 많이 아팠다.


수술이 잘 되었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기에. 아무리 눌러도 정해진 간격을 좁혀주지 않는 무통주사를 눌러대며,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오직 환자의 몫이다. 려원 씨는 짧은 간격으로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하다가 점점 끙끙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마취가 풀리면서 통증이 심해지는 모양이었다.


바짝 마른입에서 물을 마시고 싶다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물? 물 마시고 싶어? 아직 물 먹으면 안 돼 동생~. 조금만 참아."


트랙토실로 바꿔 단 이후로 다시 활력을 찾은 효진 씨가 아중씨 침대 옆에서 상태를 돌보았다. 아직 물을 마시면 안 되기에 효진 씨가 임시방편으로 거즈 손수건에 물을 적셔 려원 씨의 입술을 적셔 주었다. 아중씨도 어느새 다가와 려원 씨의 상태를 살폈다.


"지금 발이 붓고 있는 거 같은데요?"


아중 씨가 려원 씨의 발에 이불을 덮어주려다가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아마 압박스타킹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듯했다.


"일단 내 거라도 신기자."


일어나 앉아서 효진 씨와 아중씨를 보고 있던 나도 빨아 놓은 압박스타킹을 들고 아중씨가 있는 3번 침상으로 갔다.


"언니, 언니는 돌아다니면 안 돼요. 우리가 할 테니까 가서 누워 있어요."


아중씨가 내게서 압박스타킹을 뺏아 들더니 효진 씨와 한쪽씩 신기기 시작했다. 날씬한 아중씨 다리에 내 스타킹이 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미 다리가 많이 부어 오른 상태라 압박이 유지되는 것 같았다.


"발이 너무 차가워요."


둘은 아중씨 발치에 앉아 한쪽 다리씩 잡고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만삭의 두 임산부가 달라붙어 시들어 누워 있는 아픈 임산부를 간호하는 모습이 한 편의 비극 같기도 하고 희극 같기도 했다. 스타킹을 빼앗기고 차마 자리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서서 우두커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문득 화가 났다. 도대체 신랑이란 작자는 뭐 하는 사람인가. 애들도 중요하지만 와이프가 이렇게 아픈데 와보지도 않고!


서서 마음속으로 욕을 한바탕 하고 있자니 슬슬 배가 뭉치기 시작했다. 나쁜 마음을 먹어서인지 뭉치는데서 그치지 않고 점차 배가 아파져 왔다.


"미안해. 나 좀 누워 있을게."


둘은 무슨 소리냐며 손사래를 쳤지만, 고생하는 세 사람을 두고 눕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 와중에 배가 우르르 울리더니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낯선 통증이었다. 잠시 누워 있어 보아도 가라앉지가 않았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간호사를 불렀다. 수축 강도가 70이었다.


간호사는 라보파 반동수축일 수도 있고, 트랙토실에 적응 중이라 그럴 수도 있다며 물을 많이 마셔보라고 했다. 간호사의 조언에 따라 500ml를 단숨에 마시고 기다려보았지만 달리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얼마간 더 기다려보다가 차도가 없자 간호사들이 수액을 하나 더 달기 시작했다. 나는 왼쪽팔에는 트랙토실 수액 바늘을, 오른팔에는 일반 수액을 맞고 천장을 보고 누웠다. 양쪽팔이 수액라인에 묶여있다 보니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이지경이되자, 효진 씨와 아중 씨가 안절부절을 못했다. 려원 씨도 아픈 마당에 나까지 배가 아프다고 하니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내 고난은 배가 아픈 데서 끝이 아니었다.

양쪽 팔에 수액을 단 채로 어찌어찌 힘들게 저녁밥을 먹는 데는 성공했는데, 두 시간 후 혈당이 160을 넘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혈당수치였다. 혈당 때문에 라보파를 뗐는데 왜 트랙토실을 달고 혈당이 더 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배도 여전히 아팠다. 원래도 누워서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양쪽에 바늘을 꽂고 있으니 더 할 게 없었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이럴 때 나의 최선은 잠을 자는 것이다. 분노도 고통도 보통은 희석되기 마련이고, 시간도 잘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의 최선이 이번에도 최선은 아닌 모양이었다.

몇 시간 뒤 나는 결국 극심한 복통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배가 너무 아파 식은땀이 났다. 다시 간호사를 부르고, 기계가 들어와 진통간격과 강도를 측정하고, 고요하던 새벽 병실에 간호사들의 바쁜 걸음이 울려 퍼졌다.


새벽 3시.

결국 나는 트랙토실 라인을 제거하고 다시 라보파를 달았다. 약이 들어가고 30분 정도 지나자, 거짓말처럼 진통이 잦아들었다. 저 비싼 약보다 탈 많은 저렴이 수축억제제가 내 몸에 맞는 모양이었다. 어이없고 허탈하면서도 약값 천만 원을 지켰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우리 아들이 은근히 효자였구나.


그리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밥이 나올 때까지 깨지 않고 푹 잤다.


어김없이 아침해가 떠오르고, 나는 다시 라보파에 적응하느라 간간히 손을 떨면서 내과로 내려갔다. 트랙토실이 효과가 없었음을 알고 내과 의사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인슐린 추사 처방이 내려졌다. 휠체어를 타고 약국에 가서 인슐린 주사를 사는데, 이제 내가 정말 환자가 된 거 같았다.


약봉지를 손에 걸고 병실로 들어서는데, 615호 병실 앞에 낯선 사람이 보였다. 한 손으로는 유모차를 밀고 한 손은 4-5살 정도 된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여자아이는 한눈에 봐도 려원 씨를 닮아 있었다. 려원 씨의 가족들이었다.


려원 씨가 누워 있는 3번 침상은 615호 병실문과 마주 보고 있었으므로 아이는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제 엄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엄마, 엄마아!"


엄마를 보자마자 잡고 있던 아빠 손을 뿌리치고 뛰어가서는 엄마에게 안기며 펑펑 울어댔다. 아이가 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아이를 안아 달래면서 려원 씨도 퍽 당황하고 있었다.


"어떻게 왔어?"


려원 씨가 아이 뒤로 유모차를 밀고 들어오는 남자-려원 씨의 남편이었다-를 보며 당혹스럽게 물었다.


"소윤이가 엄마 보고 싶다고 계속 울어서... 나도 걱정도 되고..."


려원 씨의 남편은 말을 흐리면서 려원 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려원 씨는 어제보다는 상태가 나아져 있었지만, 고통이 다소 줄었을 뿐, 온몸에 힘들었던 수술 후 상태가 고스란히 보였다. 먹지 못해 초췌하고 부서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내의 힘든 모습에 마음이 힘든지, 잠시 울컥하는 듯하더니 곧 감정을 갈무리하고 유모차 아래에서 무엇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디카페인 커피와 조각케이크였다. 흰 피부에 처진 눈썹을 하고, 려원 씨만큼이나 여려 보이는 그는, 병상 하나하나를 돌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커피와 케이크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임신 당뇨로 먹지 못하는 달콤한 케이크보다도 나를 더 당황하게 하였던 것은 유모차에 누워 있는 려원 씨의 아기였다.


려원 씨의 둘째는 8개월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아기는 갓 백일도 되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았다. 8개월이면 붙잡고 일어설 시기인데, 아기는 미동도 없이 누워 코에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었다. 유모차에 발치에 산소포화도와 심박수를 보여주는 모니터 화면만 아기 대신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주 짧은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고 면회객은 돌아갔다. 아기에게 필요한 산소통 용량 때문에도 오래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가족들을 배웅하고 나서, 려원 씨는 잠시 말이 없었다.


우리도 말이 없었다.


남편이 아기엄마의 간병을 할 수 없던 이유. 엄마보다 더 아픈 아기가 있어서였다. 호흡기를 껴야 하고 발달이 느린 아픈 아기인지라 남에게 맡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사정도 모르면서 나는 저 남편을 얼마나 마음으로 욕하는 무례를 저질렀는가. 그리고 지금도 저 아픈 아이를 키우며, 다시 미숙아가 될지 모르는 연년생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을지 걱정하는 무례를 또한 범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입 밖에 낼 수 없는 마음의 무례를 아마도 려원 씨는 짐작했던 모양이다.


"힘내. 동생. 얼른 퇴원해서 아기 보러 갈 수 있을 거야."


효진 씨가 건네는 위로의 말에 려원 씨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애가 저렇게 아픈데, 왜 셋째를 이렇게 까지 해서 가지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시죠?"


그 물음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사회생활을 제법 오래 했는데도 나는 잘 모르겠다.

답을 기다린 것은 아닌지 다시 려원 씨가 말을 이었다.


"원래는 쌍둥이였어요... 한 명이 아니라."


그것은 그녀에게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분만징후가 있었고, 그녀의 지역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고위험산모 집중치료실에 누워 3주를 버텼다고 했다. 그리고 25주 1일에 결국 아이들이 세상에 나왔고, 쌍둥이였던 두 아이 중 한 아기만 살아남았다.


"저는 자연임신이 어려운 몸이거든요. 첫째도 둘째도 시험관으로 어렵게 가졌었는데, 그런데 기적처럼 다시 아기가 와 줘서... 다시 우리 아기가 저한테 온 거 같아서... 이번엔 꼭 건강하게 나아서, 안아주고 싶어서요. 왜냐하면 제가 안아주지도 못하고 보냈거든요. 그게 너무... 너무 미안해서요.. "


힘들 것이라든가, 어려울 것이라든가

그런 현실적인 이유 따위는

먼저 보낸 자식을 그리는 엄마의 마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나는 그렇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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