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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 Jul 13. 2021

환상

안녕, 나의 사랑이자 환상


어렸을 적부터 혼자 꿈꾸며 간직해오던 상상속의 나의 인물과 똑닮은 사람을 만났다. 평소라면 일어나지 않고 잠에 뒤척이던 이른 6시에 저절로 눈이 떠진 건 왜였을까. 툭, 툭 창문을 건드리며 내리는 얇은 비를 보고 나갈 생각을 한 것도 정말 비를 싫어하는 나에게는 의문투성이다. 나는 왜 그 이른 시간에 집 밖으로 발걸음을 돌렸을까. 자고나란 고향집을 뒤로 하고 취직을 위해 대도시의 변두리에 마련한 나의 작은 방 한칸은 대도시의 모습과 너무나 대조되며 볼품없지만 말이다.



내가 사는 곳은 재개발 추진 현수막이 거진 삼년째 붙어있는 동네다. 모든 주민들이 재개발을 원하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삼년이란 시간이 지났다고 지난 번 편의점에 맥주를 사러 갔을 때 동네 어른들의 대화를 얼핏 들었다. 아마 내 생각엔 이 동네의 재개발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군데군데 뜯어진 벽돌과 추레하고 뜯겨진 지붕. 감히 이곳이 대도시에 속하는 지 의문스럽지만 주위에 있는 24시간 불 밝은 편의점과 동전 세탁방 그리고 늦게까지 열려있는 뒷골목 술집의 청년들의 한탄과 환한 소리가 뿜어져 나오는 걸 보면 그래도 내가 있는 이곳이 도시가 맞구나 싶다.



매번 눈만 뜨면 출근하고 퇴근하면 쓰러지듯 자는 약 열평 남짓의 내 단칸방은 그저 집이 아니라 잠만 자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침은 편의점에 두 어개 남은 삼각김밥 중 하나를 골라 먹는 것이고, 저녁은 그냥 침대에 누워 주문한 배달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도시로의 상경하면 TV에서나 보던 그런 멋진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될 줄 알았지만, 내 인생은 70년도의 무채색 흑백 영화와 다름없는 지루하고 반복적이다.



아, 원래라면 일어나서 출근을 했을 그 수요일의 전날에 이상한 기분을 느꼈던 건 이상하게 연차를 낸 건 당신을 만나기 위함이었을까, 회사를 가지 않는 주말에는 16시간 내내 자는 내가 저절로 해가 뜰 무렵에 눈이 떠진 건 왜 였을까. 상쾌하기보단 축축한 한껏 늘어진 무겁게만 느껴졌던 바깥의 공기에도 성큼 나선건 무슨 이유였을까. 투명 우산을 쓰고 발길 가는 대로 걸은 그 곳에서 당신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매끄러운 디자인의 감색 셔츠를 입고 소매를 반 접은 상태로 어울리지 않은 목장갑을 끼고 분재를 갈던 당신을 본 순간 화사함에 눈이 멀어버릴 뻔 하였던 걸 당신은 알았을까. 내게 다정한 미소로 밝게 웃어주던 당신에게 지금까지 숨겨왔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말해버릴까 입을 꾹 다물고 당신 앞에서 추레한 내 모습을 보이기 싫어 다리를 비비 꼰 걸 당신은 보았을까. 귀 뒤로 머리칼을 정리한 당신의 귀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한 나를 당신이 싫어하지 않을까. 나는 당신을 만난 그 짧은 순간에도 매우 많은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당신을 처음 보고, 당신도 나를 처음 봤지만 나는 줄곧 당신을 알고 있었다.


당신을 보기 위해서 지금껏 꿈꿔왔고, 살아온 것이 틀림없다. 나의 모든 인생에 걸쳐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모든 이들이 환상 속의 이를 만나면 불행에 다다른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저 시기이자 질투일 뿐이라 생각했다. 왜냐 당신은 나의 환상이기에. 나는 환상 속으로, 당신 곁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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