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늦게 가면 큰일 나는 사람들

5. 명절 증후군

by 김수정


명절만 되면 우리 부부는 늘 같은 이유로 다퉜다.


하루라도 일찍 들어가려는 그와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가려는 내가 충돌했다. 그는 참 효자였다. '효자와 효자의 아내', 어쩌면 우리의 다툼은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너그러운 사람이었지만, 시댁, 특히 어머님에 관한 일이라면 양보가 없었다.


내 바람은 단순했다. 잠은 집에서 편하게 자고, 연휴가 시작되는 다음 날 천천히 출발하는 것. 하지만 우리 집 세 남자에게는 안 통했다. 그는 연휴 전날부터 조금이라도 빨리 가자며 서둘렀고, 아들들 또한 사촌들을 만날 생각에 들떠 같이 보챘다. 이럴 때면 아들이 셋인 것 같았다. 계속 버티는 나에게 큰아들 녀석이 간절하게 말했다.


"엄마, 아빠 말 좀 들어~ 엄마도 할머니네 가서 쉬면 되잖아~~"

아이고, 누가 지 아빠 아들 아니랄까 봐. 내 속만 터질 뿐이었다. '딸이 있어야 돼, 딸이' 이럴 땐 내 편 하나 없는 게 참 서러웠다.


결국, 세 남자의 성화에 못 이겨 퇴근해서 씻지도 못한 채 짐을 싸서 출발했다. 명절 시작부터 내 마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동안 시댁에서 음식과 상차림, 손님맞이로 바쁘게 보내고 나서야 연휴 막바지에 간신히 친정으로 향할 수 있었다.


아이들 때문에 놀라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내가 일하고 있는 사이, 고만고만한 사촌들끼리 몰려다니보니 다치는 일이 잦았다. 놀다가 넘어이마가 찢어지며 일곱 바늘을 꿰매기도 하고, 또 놀이터 철봉에서 떨어져 팔에 깁스를 한 적도 있었다. 한 번은 뜨거운 국물이 아이 등으로 쏟아져 한 달 넘게 화상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다치는 건 한순간이라고 하지만, 놀라고 속상한 마음은 아이가 다 나을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한 번은 사소한 말다툼 끝에 어머님을 ‘당신 어머님’이라고 말했다가 밥상이 날아간 적도 있다.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댁에 대한 불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 내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나 보다.


나는 사방으로 튄 밥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가 소리를 빽 질렀다.

"당신 어머님?"

"그래, 당신 어머님!"

나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말해놓고 금방 후회했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예전의 수줍던 새댁의 모습은 어디 가고 내 목소리에도 날이 서 있었다.


한바탕 폭풍우가 쓸고 지나간 다음, 그가 주섬주섬 흩어진 밥상을 치웠다. 우리는 서로 화가 나 있는 상태로 침묵 속에 며칠간의 냉전을 이어갔다. 그는 '명절만큼은' 어머님과 함께 있고 싶어 했고, 나는 '명절이니까' 더 쉬고 싶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마음을 이해하고 그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버님께서는 우리가 결혼하고 큰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간암 진단 후 한 달 만에 허망하게 유명을 달리하신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홀로 남으신 어머님을 더 살뜰히 챙겼다.


술에 취한 날이면 그는 아버님 생각에, 또 홀로 되신 어머님 생각에 눈물을 훔쳤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는데, 아버님의 부재가 실감 나지 않을 만큼 삼 형제가 너무 잘 살아가고 있더란다. 아버님을 그리워하는 그의 모습 속에서, 진한 연민이 느껴지곤 했다.


남편의 마음을 온전히 따라가기는 쉽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향한 그의 책임감과 애정을 지켜보면서 그의 효심에 서서히 동화되어 갔다. 어머님과 함께 여행을 다니면 행복해하고, 맛있는 음식도 어머님과 함께 먹어야 맘이 편하다고 하던 사람. 때론 애교로, 때론 간절한 설득으로 내 마음을 움직였다. 딸 같은 막내아들에 딸 같은 며느리라고 좋아하셨던 어머님. 살가운 남편 덕분에 우리 부부는 어머님께 더 많이 사랑받았다. 그를 있게 한 어머님, 그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님을 나 또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님은 종갓집 맏며느리답게 손이 크셨다. 추석이면 송편, 설이면 만두를 얼마나 많이 빚었는지 모른다. 편을 갈라하던 윷놀이와 밤새 이어지던 고스톱. 그 떠들썩하던 명절 풍경이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큰아들이 대학에 진학할 무렵, 시댁은 과감하게 제사를 없애고 명절마다 함께 여행을 다니기로 했다. 어머님의 결단에 며느리들은 환호했고, 남편들짜냐며 어머님께 재차 확인했다. 그 당시 얼마나 파격적인 결정이었는지,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콩닥거린다.


그렇게 우리 집안의 ‘명절 여행’이 시작되었다. 어디로 갈지 여행지를 고르고, 숙소를 알아보고, 일정표를 함께 꾸려보는 과정이 예전 명절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집 안 가득 전 냄새가 퍼지고 새벽같이 일어나 제사 준비를 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여행 가방을 싸며 들썩이는 명절이 된 것이다.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며 시행착오가 생기기도 했다.


한 번은 여행을 갔을 때 큰 형님이 삼계탕을 직접 준비해 오셨다. 싣고 온 짐이 한가득이었다. 삼계탕을 삶을 커다란 솥부터 김치와 밑반찬까지 정성스레 챙겨 오신 덕분에 든든한 한 끼를 먹을 수 있었다. 식당이 따로 없는 펜션이어서, 우리는 모두 한방에 모여 등이 서로 닿을 만큼 바짝 붙어 앉아 밥을 먹었다. 불편할 법도 했지만, 그마저도 마냥 좋았다.


그다음부터는 큰 식당이 갖춰져 있거나 가족용 독채 펜션을 예약했다. 조카며느리와 손자들까지 포함해 열여덟 명이나 되는 식구들의 밥을 하고, 차리고, 치우는 일은 매번 만만치 않았다. 편해지고 나니 더 편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가 보다. 우리는 몇 번의 여행을 거치며 식사는 자연스레 여행지 맛집을 찾아가는 쪽으로 바뀌어 갔다.


큰 형님은 여전히 명절 음식이 빠지면 아쉬운지, 전과 떡을 손수 준비해 오신다. 그럴 때마다 아들들과 조카들은 “역시 전은 큰엄마가 해줘야 제일 맛있다”며 큰엄마 최고라고 너스레를 떤다. 형님의 음식 솜씨도 솜씨지만, 정성 들여 준비해 오신 그 마음에 여행은 늘 더 풍성해졌다.


명절 여행에서 또 한 가지 감사한 이벤트는 어머님 카드였다. 대가족이다 보니 한 끼만 사 먹어도 금액이 만만치 않았는데, 어머님은 언제나 가장 푸짐한 한 끼를 흔쾌히 사주셨다. 바닷가에 가면 회를, 제주도에 가면 흑돼지 오겹살을 먹자며 지갑을 여셨다.


형님들과 끝없이 이어지는 수다도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이다. 유난스러웠던 나의 초보 며느리 시절을 놀리는 것으로 시작해, 명절에 손님 맞느라 엉덩이에 불난 듯 종종거리던 일들을 꺼내다 보면 밤을 새워도 모자랐다.




힘들다 투덜대던 명절, 고단했던 명절증후군도 이제는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명절이 되면 '이번엔 어디 가지? 가서 뭐 하고 놀까'를 즐겁게 상상한다. 예전의 명절 풍경과는 달라졌지만, 변함없이 가족들이 함께 모여 시끌벅적한 시간을 보낸다. 모이는 걸 좋아하는 우리 가족, 함께 있으면 늘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가족이 있어 행복한 마음으로 명절을 기다린다.


남편과 아이들이 그때 왜 그렇게 나를 들들 볶으며 가고 싶어 했는지, 몸이 좀 편해지고 나니 알겠다.


'나도 몸이 편했으면 빨리 가자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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