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공부와 육아
결혼할 당시 나는 대학원에 재학 중이었다. 그때만 해도 금방 졸업할 줄 알았다.
큰 아이가 돌이 지나고 육아가 조금씩 안정되자, 나는 휴학 중이던 대학원에 복학했다. 수업이 있는 날이면 큰 아이를 친정엄마나 시어머님께 맡기고 학교로 향했다. 공부와 육아를 병행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니 또 다른 에너지가 생겨났다. 무엇보다 시작한 학업을 끝까지 잘 마무리하고 싶었다.
학교에 갈 준비로 분주하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냄새에 예민해지며, 첫 아이를 가졌을 때 느꼈던 익숙한 메슥거림이 다시 찾아왔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병원에 가보니 임신이었다.
둘째 아이는 천천히 가질 계획이었다. 공부를 계속 이어가고 싶었고, 첫째 아이 육아만으로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큰아이 겨우 15개월, 아직도 손이 많이 가는 아기였다. 아이 하나도 간신히 키우고 있는데, 다시 임신과 출산을 겪어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함이 밀려왔다.
남편에게 임신 소식을 전하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갑자기 크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걱정이 앞서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던 그의 표정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 역시 그동안 나와 아이를 지켜보며 마음 졸였던 많은 순간이 한꺼번에 떠올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둘째도 잘 키울 수 있다며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기뻐하는 그의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며, 내 안의 불안이 사르르 풀려갔다.
둘째는 첫 아이 때보다 입덧이 훨씬 심했다. 주방 근처에만 가도 냄새에 유난히 예민해져 구역질이 쏟아졌다. 입덧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고, 결국 학교는 복학한 지 한 학기 만에 다시 휴학할 수밖에 없었다.
입덧이 조금씩 잦아들고, 큰 아이를 돌보며 뱃속의 둘째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고 있었다.
출산이 불과 한 달 앞으로 다가왔을 무렵, 남편이 일본으로 장기 출장을 가게 되었다. 출산 예정일과 그의 귀국 날짜가 겹쳐, 그가 없는 사이에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었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큰 아이와 함께 친정에서 지내기로 했지만,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그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밤마다 배가 단단히 뭉칠 때면, 배 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고 아기에게 속삭였다.
'아가, 아빠 올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줘"
아기가 내 말을 듣고 있었던 걸까.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온 그날 밤, 바로 진통이 시작됐다. 마치 아빠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아기는 세상으로 나올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첫 아이 때는 코를 골며 자던 남편이 이번에는 밤새 내 곁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둘째의 울음은 그의 품 안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아침 8시 30분, 4.2kg. 아기가 커서 첫아이 때보다 훨씬 힘든 출산이었다. 진이 다 빠져 한동안 숨을 고른 후에야 둘째 아이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작고 발그레한 아기는 조용한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고, 그 모습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출산 후 몸조리를 위해 친정으로 갔다. 첫아이는 우리 집에서 산후조리를 했지만, 이번에는 큰 아이를 함께 돌봐야 했기 때문에 가족들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친정이 나도, 엄마도 여러모로 더 편할 것 같았다.
둘째를 낳고 큰 아이가 소홀함을 느낄까 봐 걱정이었는데, 막상 동생을 바라보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아직 자기도 아기인데, 막 태어난 동생을 들여다보며 “아가야” 하고 속삭이는 모습이 다정했다. 동생이 태어나면 사랑을 빼앗길까 봐 시기하는 경우도 많다지만, 큰 아이는 동생을 보물 다루듯 귀하게 여겼다. 동생이 잠들면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다니는 모습에 친정엄마는 “저런 애가 다 있냐?”며 감탄하곤 하셨다.
큰 아이를 키운 경험 덕분에 둘째는 조금 더 수월하게 키웠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자주 아팠다. 내 육아 방식이 문제인지, 아이들의 면역력이 약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큰아이가 감기에 걸리면 작은아이가 또 감기에 걸리고, 번갈아 아프기를 반복했다. 아픈 아이들을 돌보느라 밤을 꼬박 새우는 일이 잦았다. 두 아이를 업고 안고 버스를 타고 병원을 오갔던 날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잔병치레가 잦다 보니, 나는 매년 한의원에서 면역력에 좋다는 보약을 지어 먹였다. 그 한약 때문이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둘째의 머리색이 밝은 갈색으로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피부는 하얗고 머리는 갈색에 눈은 커다래서, 밖에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은 종종 “아빠가 외국인이에요?” 하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당황하며 “아니에요!” 하고 크게 대답하곤 했다.
시간이 지나 머리색이 자연스럽게 진해지면서 더 이상 그런 말을 듣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학교 공부도 중요했지만, 나에게 가장 우선은 아이들이었다.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기 때는 온전히 육아에 마음을 쏟았고, 아이가 조금 자라 부모님께 잠시 맡길 수 있게 되면서 학교에 복학했다.
아이가 나와 떨어지기 싫어 울거나 특히 아플 때면, 중간에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 번 들었다. 내 학업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아이들이나 남편에게 미안할 때도 많았다. 그런 시간을 조금씩 참고 버티다 보니 어느새 논문 심사만 남겨 두게 되었다. 작은아이가 네 살이 되어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좀 더 시간적 여유가 생겼고, 그제야 논문 작성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낮에는 학교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찾고, 밤이면 그 자료를 정리하며 논문을 써 내려갔다. 전공이 시각디자인이다 보니 사진 자료가 많았다. 그 사진만 정리해서 편집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하다 보면, 잠에서 깬 아이들이 나를 찾았다.
“엄마, 쉬.”
큰아이를 챙기고 있으면 이번엔 작은아이가 눈을 비비며 내게로 왔다. 칭얼대는 아이를 안아 다시 재우고 나면, 머릿속에 정리해 두었던 내용이 한순간에 다 날아가 버리기도 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타자를 두드리다 보면 어느새 창밖이 밝아 있었다.
마침내 7년 만에 졸업식을 맞이했다. 졸업식 날, 남편과 두 아들의 축하를 받으며 학사모를 썼다. 교정 곳곳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내 졸업을 함께 기뻐해 줄 만큼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자라 있었다.
그 학위가 뭐라고, 왜 그렇게 긴 시간 고생하며 매달렸을까 싶다가도, 두 아이를 키우며 받은 졸업장이었기에 ‘해냈다’라는 성취감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미술학원과 미술강사 일을 시작하며 나의 든든한 이력 한 줄이 되어준 졸업장, 그 석사 학위패는 지금도 책장 한켠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치 나를 응원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