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는 안 그래야지
'아기가 내 품으로 왔다.'
밤새 이어진 산고의 고통으로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지만 마음은 기쁘고 행복했다. 아기 보다 먼저 회복실로 옮겨진 나는 지친 몸을 눕히고 아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목욕을 마친 아기가 내게로 왔다. 숱이 많은 검은 머리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조심스레 아기를 감싼 속싸개를 풀며 아기의 손과 발을 살폈다. 홍조 띤 얼굴은 건강해 보였고, 손가락과 발가락은 모두 다섯 개씩 앙증맞게 오므려 있었다.
너무나 작고 여린 아기, 아기의 손을 잡았다.
"아가야, 엄마야."
출산하고 열흘째 되던 날, 또다시 제삿날이 돌아왔다. 그날은 어머님의 생신이기도 했다. 그의 할머니 제사와 어머님 생신이 같은 날이었다.
아직 회복이 덜 된 몸으로 아기는 잠시 친정엄마께 맡기고 그와 함께 시댁으로 향했다. 결혼 후 처음 맞는 어머님 생신이라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싶었다. 시댁은 이른 아침부터 친척들로 북적였고, 형님들은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이며 아침상을 차리느라 애쓰고 계셨다.
지금은 외식이 흔하지만, 그때만 해도 무슨 날이면 집에서 음식을 손수 차려야 했다. 음식을 준비하고 차리고, 다시 치우는 일까지 모두 며느리의 몫이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곧 점심상, 이어 제사 준비까지 며느리의 일은 하루 종일 끝이 없었다. 더구나 우리 시댁은 고모네, 이모네, 외가 식구들까지 손님이 항상 많았다.
생일상은 풍성했다. ‘그 많은 음식을 언제 다 준비했을까?’ 싶을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이 가득 차려졌다. 가족들 모두가 어머님의 생신을 축하하며 건강을 기원하는 덕담을 나누었다. 출산한 나에게도 수고했다는 격려의 말이 이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막내며느리로서의 하루가 평화롭게만 보였다.
아침상을 물린 뒤, 어머님은 몸조리 중인 나를 집에 가서 쉬라며 보내주셨다. 생일상도 함께하고 친척분들께 인사도 드렸으니 막내며느리의 몫은 다 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게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친정엄마는 우리 집에 머물며 내 산후조리를 도와주고 계셨다. 아빠는 낚시를 가서 커다란 잉어를 잡아 오셨고, 엄마는 그 잉어에 한약재를 넣어 정성껏 고아 하루 두 번 데워주셨다. 비릿한 냄새에 먹기 힘들었지만, 몸 회복에 좋다 하니 코를 막고 억지로 삼켰다. 산모가 잘 먹어야 젖이 잘 돈다고 하시며 미역국도 하루에 네 번씩이나 차려주셨다. 배부르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음식이며 청소, 빨래, 아기 돌보는 일까지, 엄마는 쉴 틈 없이 내 산후조리에 온 정성을 기울이셨다.
이른 저녁, 엄마가 차려주신 미역국을 먹고 아기에게 수유하고 있을 때였다. 시댁에 있던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할머님 제사도 있고 친척들을 대접하느라 그는 계속 시댁에 머물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의 목소리는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
"수정아, 한복으로 갈아입고 집으로 내려와"
"응?"
"할머니 제사에 막내 손주 며느리가 첫인사 드려야 한다고.. 힘들겠지만 일단 내려와"
"응.."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일단 한복으로 갈아입고 시댁으로 향했다.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였지만,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긴 거리였고 한여름이었다.
힘들게 시댁에 도착하자, 마당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는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었다. 화가 나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집안 어른들께 화도 나고, 나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을 터였다. 시댁으로 나를 부르기까지 집안의 소동이 미루어 짐작되었다.
발단은 늦게 도착하신 작은아버님 때문이었다. 시댁에서 아버님 다음으로 집안의 어른이셨고, 시부모님도 작은 아버님 말씀이라면 토를 달지 않으셨다. 그분이 할머니(그분께는 어머니)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나를 문제 삼으신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며느리가 시댁의 크고 작은 행사에 빠지는 일은 곧 불효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몸조리 중이었기에 그 사정을 헤아려 주실 거라고 생각했다.
건넌방으로 부르시는 작은아버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깐 내려와 인사하는 게 뭐 그리 힘드냐?”
“옛날에는…”
작은아버님의 훈계가 이어졌지만, 나는 묵묵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 큰 분란은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말씀이 끝난 뒤, 나는 간신히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작은아버님. 제가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 미처 생각을 못 했습니다.”
내 말을 들은 작은아버님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어머님도 옆에서 “삼촌(작은 아버님), 내가 집으로 보냈어, 내가!” 하시며 나를 감싸셨다.
작은아버님이 자리를 뜨시자 어머님이 내 등을 토닥여 주셨다.
'시댁의 가풍인가 보다' 하고 이해했다. 오히려 화가 나 있는 그에게, '난 괜찮다.'며 그를 다독였다.
어머님, 아버님도 안 시키던 시집살이를 시작은 아버님께 혹독히 치른 셈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정작 불같이 화를 내신 건 우리 엄마였다.
몸조리 중인 나를 시댁에 보내고, 이제나저제나 애태우셨을 엄마였다.
엄마는 그 화를 쏟아내셨다.
"뭐 얼마나 대단한 집안이라고? 산사람이 중요하지 죽은 사람이 대수야?
내 참, 살다 살다 제사 지내라고 몸조리하는 며느리 불러 내리는 집은 보다 보다 첨보네.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엄마가 아주 멀리 시집가랬지? 이 꼴 저 꼴 안 보고 살게!"
엄마의 화는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았다.
딸 가진 죄인이라며 시집을 보내고도, 엄마의 걱정은 끝이 없었다.
엄마는 22살에 나를 낳으셨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집에서 출산하는 일이 흔했는데, 엄마는 집에서 사흘 동안이나 진통을 겪다가 난산으로 결국 큰 병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털털거리는 경운기를 타고 산부인과로 가셨다니, 조그만 늦었어도 산모와 아기 모두 위험한 상황이었다고 하셨다.
그렇게 생사의 고비를 넘고 나를 낳으신 엄마에게, 나 역시 세상에 없는 귀하디귀한 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