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하지만, 기다리지 못했던 시간
연애와 결혼, 출산까지 숨 가쁘게 지나가는 동안 나는 아내가 되었고, 며느리가 되었고,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내 이름보다 ‘누구의 엄마’로 더 자주 불리게 되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보니 늘 이런저런 걱정이 따라왔다. 아기 때는 자주 아파서 걱정이었고, 좀 더 크면 편해질까 싶었지만, 돌이 지나면서 도통 밥을 먹지 않아 또다시 애를 태웠다.
둘째 아이가 유독 잘 먹지 않았다. 밥을 씹지 않고 입안에 물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달래기도 하고, 때로는 혼내기도 하며 한 숟갈씩 쫓아다니며 먹였다. 어른들은 '배고프면 다 먹는다'고 했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더 먹이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을 냈다. 한 끼를 먹이는데 한 시간이 훌쩍 지나기 일쑤였고 매끼가 전쟁처럼 느껴졌다. 그런데도 아이가 먹는 양이 워낙 적다 보니 4.2kg의 우량아로 태어났던 아이는 자라면서 체중 미달이 되어버렸다.
둘째의 모유 수유 기간은 한 달 남짓으로 짧았다. 젖몸살이 심해 항생제가 들어간 약을 처방받으며 수유를 중단하게 되었고, 약을 복용하는 동안 젖이 말라 수유를 이어갈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아이가 더 약해진 건 아닐까 속상하기도 했다.
체력이 약한 둘째는 자주 보채고 떼를 썼다. 아이를 달래려 사탕을 하나씩 입에 넣어주곤 했는데, 그러면 신기하게도 금세 잘 놀았다. 하지만 그 방법은 오히려 밥을 더 멀리하게 만들었고, 단것만 찾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체중은 좀처럼 늘지 않았고 치아에는 충치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 번은 구내염이 심하게 생겨 병원에서 입안에 보라색 약을 발라준 적이 있었다. 문제는 그 약이 앞니에 착색되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갈이가 끝날 때까지 앞니가 보라색을 띠고 있어, 아이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이 쓰였다.
보라색으로 착색됐던 앞니가 빠지고 새하얀 이가 돋아날 즈음, 둘째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학교 급식은 3학년부터 시작되었는데, 둘째는 수업이 끝나면 어김없이 큰아이 반 앞에 가서 형을 기다리곤 했다. 그 모습을 눈여겨보신 담임 선생님은 가끔 둘째를 불러 급식을 나누어 주셨다. 교실에서 직접 배식을 하던 시절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선생님의 세심한 배려 덕분인지, 그 무렵부터 둘째는 밥을 제법 잘 먹기 시작했다. 이후 점점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아이로 바뀌어갔다.
내 조바심과는 다르게, 언제 그런 걱정을 했나 싶을 만큼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었다.
두 아들을 키우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동안 석사논문을 마쳤고, 시내로 이사도 했다. 그 무렵 새로운 일을 찾던 나는 전공을 살려 집 근처에 작은 미술 교습소를 열었다.
집과 가까워 아이들을 틈틈이 돌보며 일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수강생 한 명 한 명을 내 아이를 돌보는 마음으로 정성껏 지도한 덕분인지, 원생들이 늘어나며 교습소는 곧 미술학원으로 확장되었다.
초등학교 앞에 위치한 미술학원은 두 아들과 같은 또래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알려졌다. 또 그 당시 도입한 창의 미술 프로그램이 좋은 호응을 얻으며 엄마들의 입소문을 타고 학원생들이 점점 많아졌다. 학원이 커지면서 강사 선생님도 세 분으로 늘어났고, 토요 특강반까지 개설해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두 아들 역시 방과 후 미술학원에서 종종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는데, 정작 우리 아이들에게는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 스스로 잘 알아서 하길 바랐고, 학원생들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학원에서는 두 아들에게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게 했고, 아마도 더 엄격하게 대했던 것 같다. 어느 날 큰아들이 학원 아이들에게는 늘 상냥하면서 자기들은 혼만 내는 엄마 때문에 슬펐다고 털어놓았다. 그런 아이의 마음을 미처 알아주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많이 미안하다.
학원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 두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내가 바쁘다 보니 둘째는 항상 형을 졸졸 따라다녔다. 두 살 차이뿐이었지만, 큰애가 꽤나 믿음직스러웠다. 학원도 같이 다니고 둘이 잘 노니 일하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작은 아들은 형 친구들과 더 많이 어울렸고, 큰애가 생일 초대를 받으면 동생도 꼭 함께 데려갔다. 주변 엄마들은 그런 큰애를 보며 “어쩜 그렇게 동생을 잘 챙겨요?” 하고 칭찬하곤 했다.
그렇게 믿음직하고 순하게만 크던 큰아들이 처음으로 크게 반항하는 일이 생겼다. 초등 5학년 때 다니기 싫다는 학원을 억지로 보내면서부터였다. 그 학원은 학부모님이 운영하는 국. 영. 수 학원이었는데 원장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분명 아들도 학원을 좋아할 거라 생각하며 일주일만 체험해 보자고 설득했다. 다녀보고 정말 싫으면 그만둬도 좋다고 약속까지 했다. 하지만 정작 일주일이 지난 후에 그 약속을 뒤집어버렸다.
나도 학원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일주일 체험만 하고 그만두는 것이 그 학원 원장님께 영 미안했다. 가장 중요한 아이의 의견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순종적인 아이라 내 말을 따를 거라고 쉽게 예단했다. 사실 큰아들은 애초에 학원에 다닐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큰아들은 나의 고집과 강요로 가기 싫은 학원을 억지로 다녀야 했고 그때 쌓인 불만은 꽤나 오래갔다.
다행히 원장님을 잘 따르고 수업 방식이 아이에게 맞아 무난히 적응해 갔지만, 나는 아이의 신뢰를 잃고 말았다. 그렇게 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엄마가 되었다. 그 당시 아이가 받았을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는지,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 일을 교훈으로 삼지 못하고, 아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큰아들에게 큰 상처를 남기는 일이 생겼다.
중딩 큰아들 눈물의 에피소드는 다음 화에 이어갑니다.
PS. 휴가 잘 다녀왔습니다. 연재가 좀 늦어졌어요.
방학 때는 수업이 많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찾아와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해요.
2026년 두 배로 행복하시고, 평화로운 나날들 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