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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Aug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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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사랑으로 쓰인 방명록


늦은 시간에 막내가 퇴근하며 병실에 들렀다. 

막내는 아빠 옆에 더 있고 싶은데 일이 많아 퇴근이 늦어진다며 속상해했다.


그 말을 듣고 남편은,

"막내야, 선배나 위에 상사분에게 우리 집 상황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양해를 구해, 그럼 배려해 주실 거야, 아빠도 그랬어" 그는 조금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할아버지 위독하실 때 선배에게 상담했고 그의 사정을 알게 된 동료들의 배려 덕분에, 서울 병원에 머물며 아버님을 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의 고마움이 지금까지도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선 후배 간의 정이 쌓이며 회사 생활도 해나가는 거야, 막내도 동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같은 마음으로 도와주고.." 라며 아들의 모습에서 그때 자기의 모습이 오버랩되는지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막내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의 손을 꼭 잡았다.

후에 막내는 아빠의 상황을 선배에게 상담했고, 선배도 어머님이 암으로 투병하다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하며 막내를 많이 격려하고 배려해 줬다고 한다.






그를 찾아온 많은 방문객 중에 유독 기억에 남은 몇몇 분이 계신다.


한 분은 마라톤 동호회 총무를 맡았던 회사 동료이다.

남편은 사내 마라톤 동호회 회장이었는데 그때 남편을 도와 행사를 진행, 나와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남편 소식을 듣고 다른 직원들과 시간을 맞출 새도 없이 서둘러 혼자 오셨다며 남편의 악화를 안타까워하셨다.


총무님은 남편이 처음 지방 발령을 받고부터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던 분이다. 마라톤 동호회도 가족과 함께하는 행사로 진행하다 보니 할 일이 정말 많다고 들었는데, 남편과 함께 항상 즐겁게 준비해 주시던 분이었다. 남편과 회사 생활을 오래 하셔서인지 이야기하는 내내 남편의 악화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남편을 바라보그분의 슬픈 표정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회사 직속 후배도 있었다. 오랜만에 후배를 만난 그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그 직원분은 남편의 부재로 남편이 하던 일을 도맡게 되며 힘들어진 회사 생활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팀장님이 상사로 계셨을 때가 좋았습니다. 다시는 팀장님같이 좋은 분을 못 만날 것 같습니다. 감사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착잡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병문안을 마치고 배웅하는데 그분이 갑자기 복도에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병실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진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우시더니 "팀장님 많이 힘드셨을 겁니다. 궂은일 다 도맡아 하시고.." 하며 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고는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후 앨범을 들고 다시 병문안을 오셨다. 그가 팀장으로 재직할 당시의 수년간의 사진을 출력해 앨범으로 만들어 온 것이다. 우린 그분의 정성에 감동했고, 앨범 속 건재했던 그의 모습을 보며 같이 그 시간을 회상했다.


그 외에도 그를 사랑하고 아껴주셨던 회사 분들의 병문안이 이어졌다.

항암 때마다 장어를 사주시며 항암 잘 받으라고 격려해 주시던 상무님, 우리 반려견 호야를 흔쾌히 맡아주시고 자주 오셔서 밥도 사주시며, 누구보다 그의 복직을 빌어주셨던 외주업체 부장님, 보양하라고 소고기를 사서 보내주던 고교 후배, 그의 위독함을 회사에 전하고 직원들과 함께 와준 회사 동료, 일일이 다 거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이 다녀가셨다.



하루는 조카들이 온다고 하니, 들뜬 듯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샤워도 하고 머리도 예쁘게 빗겨주었다. 옷도 병원복이지만 깨끗하게 갈아입고 조카들을 맞이했다.

어느새 30이 넘어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있는 조카들은, 어릴 적 삼촌과의 추억을 얘기하며 그와 시간을 보냈다.


큰 조카는 자라면서 삼촌을 아빠로 둔 우리 아들들이 엄청 부러웠다고 한다. 어릴 때는 잘 놀아주던 삼촌이 결혼하고 두 아들이 생기며 자기들과는 많이 안 놀아줘서 서운했다고 그때의 섭섭함을 얘기했다.

한 번은 "삼촌, 왜 우리랑은 안 놀아줘" 하며 따진 적도 있다고 한다. 그 얘기에 그도 나도 많이 웃었다. 다 큰 녀석들이 와서 어릴 때 마음을 얘기하니 '녀석들, 삼촌 진짜 많이 좋아했네' 싶어 웃음이 터졌다.


조카들이 중학생 때, 바쁜 형님네를 대신해 우리 가족 여행에 데려간 적이 있었다. 그때 별로 잘해주지도 못했는데, 그 시간이 행복했었다고 말하는 조카들을 보며 참 고맙고 미안했다.


시댁도 친정도 친인척들이 가까이에 많이 사신다. 그의 소식을 듣고 이종, 고종사촌들의 방문이 계속 이어졌고, 가까이 사는 친척은 물론이고 멀리 사시는 친지분들의 방문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를 보며 나만큼 가슴 아파한 그의 절친도 있다. 남편과 생일도 같고 동네에서 함께 자란 친구이다. 그가 가장 많이 의지했던 친구였고, 투병 기간 내내 견과류, 과일, 그가 좋아하는 누룽지탕을 수시로 만들어 보내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었다.  


병문안을 와서 혹여나 그의 마음이 약해지지나 않을까 그를 다독였다. 자기보다 먼저 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며 그의 악화에 나만큼 조바심을 냈었다. 매일 카톡이나 전화로 그의 안부를 물어왔고 내가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면, "제수씨, 우리 사이에 이런 인사 생략해도 돼요. 제수씨 건강도 잘 돌보시고요." 라며 누구보다 그의 회복을 바라던 고마운 친구였다.


또, 서울 병원에 다녀올 때면 들러서 밥 먹고 가라고 챙겨주던 성당 후배, 다친 다리를 절뚝이며 와서 마음 아파한 친구, 복숭아를 수시로 보내주던 친구, 초등학교 모임인 오칠회친구들, 삼우회, 내성회, 선목회 등등.. 많은 친구와 선배들이 다녀갔다. 그는 모임도 많았고, 참 많이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그를 찾아오는 면회객을 맞이하며 하루하루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렇게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신 2주일이 훌쩍 지났고 내 생일이 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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