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들에게 아빠를 부탁한 후 병실을 내려왔다. 병원 밖에서 그를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과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2월 말 쌀쌀한 날씨에도 긴 시간 기다리신 분들에게 그의 상황을 전했다.
한 명씩만 병실 방문이 가능했기에 큰형과 작은형, 형님들, 그리고 친구, 지인들이 차례로 병실을 방문했다.
그는 반갑게 손을 맞잡기도 하고, 가볍게 포옹도 하며 가족과 친구들을 맞이했다.
선목회 친구들도 멀리 대구에서 올라왔다. 그와 같이 신학교를 다니다 그처럼 중퇴한 친구들이었다. 그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그 친구들이 모임을 만들었고 우리 집에서도 모임을 했었다. 우리 집에는 오래 묵혀둔 귀한 송이주가 있었는데 그날 그 송이주가 개봉되었다. 송이 국물까지 꼭꼭 짜서 먹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서로 많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 모임 때면 우리 집에서 먹었던 송이주가 최고였다며 그때의 추억을 다시 소환하고는 했다.
친구들은 꼭 회복해서 송이주를 다시 먹자며 그와 나를 격려하고 돌아갔다.
반가운 얼굴들을 보고 나니, 그는 기운이 나는 듯했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우리 가족만 남았을 때,
그는 두 아들에게 미리 결혼식 주례사를 남기고 싶다며 당부의 말을 시작했다.
부부의 믿음, 성가정, 봉사하는 삶이었다.
큰아들은 그런 아빠의 모습을 영상으로 찍고 있었다.
먼저, 부부의 믿음과 신뢰에 대해 "네가 먼저 아내를 믿어주면 아내도 너를 믿고 따를 거야" 어떤 경우에도 서로를 믿으라고 강조해서 말해주었고, 우리 집처럼 꼭 '성가정'을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소망과, 마지막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아빠의 바람을 담담하게 얘기했다.
끝으로 미래의 며느리에게
"며늘아가, 결혼 축하한다. 사랑해"
라며 그의 목소리가 잠시 울먹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아들들이 여자 친구만 소개해 줘도 너무 좋아하던 그였다. 며느리를 얼마나 보고 싶고, 얼마나 그 말을 직접 전하고 싶었을까? 누군지도 모르는 며느리에게 영상을 남기는 그를 보며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손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다시 건강해져서 아들 결혼식 주례사를 직접 하고 싶다며 말을 맺었다.
입원 다음 날 친정엄마가 다슬기 된장국을 끓여 오셨다. 통 못 먹던 그가 한 그릇을 다 비우고는 입 맛이 돈다며 좋아했다. 장모님 음식이 최고라는 그를 보며, 마음 아파 내내 눈물짓던 엄마도 잠시 미소를 지으셨다. 엄마는 사위가 잘 먹는 모습이 좋으셨는지 이후에도 다슬기 된장국을 담백하게 만들어서 계속 보내주셨다.
통증이 잡히며 식욕이 돌아온 그를 위해,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은 병원으로 음식을 해오기 시작했다.
고구마로 단맛을 낸 작은형님의 호박죽, 큰형님 표 시원한 물김치, 콩죽과 깨죽을 만들어 그릇마다 사랑의 메시지를 적어 보내준 지인 언니 등, 정성이 담긴 음식이 매일 돌아가며 병원 그의 식탁에 차려졌다.
갑자기 계란 프라이가 먹고 싶다고 해서 가까이 사는 지인 언니에게 부탁하니, 금세 수란을 만들어 왔다. 그 수란을 한입 물고 얼마나 행복해하던지, 전화 한 통에 수란을 만들어 달려와 준 언니가 너무 고마웠다. 또 김밥을 먹고 싶다고 하니 정성스러운 야채 건강 김밥을 만들어 왔다.
지인 언니가 싸 온 야채 김밥
도깨비방망이처럼 그가 말하면 뚝딱 음식이 마련되었다. 그의 회복을 바라는 많은 사람의 정성과 사랑을 먹으며 그는 조금씩 기운을 차리고 있었다.
하루는 점심을 뭘 먹을까 입맛을 다시던 그가 갑자기 대게가 먹고 싶다고 했다. '소화가 잘될까?' 걱정스러워 먼저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니 괜찮다고 하셨다. 대게를 파는 식당에 전화해서 병원으로 배달을 시켰다. 그렇게 해서 폭 쪄진 대게를 토요일 점심 만찬으로 올려놓았다. 발라준 게살과 게딱지에 밥까지 비벼서 그는 정말 맛있게 먹었다.
어느 날 아침엔 계속 먹던 죽이 싫었는지, 커피와 빵을 먹고 싶다고 했다. 설탕과 밀가루가 들어간 음식은 금지하고 있어서 난색을 보이니 엄청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차 싶어, 얼른 카스테라와 커피를 사 오니 한입 먹고는 입에 맞지 않는지 더 이상 먹지 않았다. 그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주저했는지, 그에게 조금이라도 건강한 음식을 먹이고 싶었던 내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그가 음식을 잘 먹으니, 그의 상태는 호전되는 것만 같았다. 피검사와 간 수치도 더 이상 나빠지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요일 오전에는 어머님이 오셨다. 막내아들의 얼굴을 몇 번이고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셨다. 눈물로 기도하시는 어머님 곁에서 함께 기도했다. 가능하면 매일 전화드렸고, 밥은 잘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그의 일과를 전해드렸다. 어머님은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하셨다.
매일 면회객 3~4팀 정도가 병원을 방문했다. 미리 전화를 주셨기에 면회가 가능한 시간을 알려드렸고, 그가 보고 싶어 찾아온 가족, 친지, 지인들을 그는 반갑고 감사한 마음으로 맞이했다. 부득이 그가 잠들거나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미리 상황을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한 명씩만 병실 면회가 가능했기에, 친구나 회사 분들이 단체로 오는 경우에는 그가 병원 로비로 내려갔다. 어느 정도의 활동과산책이 가능했고,병원에서는 위독하다고 했지만 난 그와의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내는 데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