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수정 Jul 29. 2024

준비할 수 없는 내일

 17. 불확실한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


2차 항암을 시작하며 그는 회사에 퇴직계를 제출했다.


완치되어 건강한 모습으로 회사에 다시 복직하고 싶어 했지만, 결국 퇴직계를 내며 30여 년 간의 회사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의 복귀를 무기한 기다려 줬던 회사, 그와 함께 일했던 직원들로부터 감사패와 함께 회사 집기들이 전해졌다.


감사패를 받은 그의 표정은 너무도 쓸쓸했다.  




2차 항암에 지쳐있는 그를 위해 집에 방울토마토를 심었다. 방울토마토 씨앗을 구매하니 화분과 자세한 설명서까지 배송되었다. 2월 3일 날짜를 써 놓고 방울토마토가 열리면 따먹을 생각에 매일매일 얼마큼 컸는지 지켜보며 보냈다.


그렇게 평온한 하루이길 바라던 아침,

명절이 지나며 조금씩 악화되던 그에게 갑자기 찾아온 황달이 찾아온 것이다.



황달이 오면 응급상황이라고 했던 의사 선생님 말씀 떠올라 급하게 119를 불렀다. 119를 타고 서울 병원으로 향하며 두려운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는 옆에 앉아 있는 내 손을 꼭 잡았다.


응급에 도착해서 여러 가지 검사 후 의사 선생님은 보호자인 나를 따로 부르셨다. 보호자만 따로 부른다는 건 경험상 안 좋은 소식을 전할 때였다. 역시나 종양의 악화로 황달을 잡을 수 없다는 소견이었고, 사실상 병원에서 해줄 게 없다며 퇴원을 권유했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내가 그의 보호 자니까...


집으로 돌아가 요양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고, 당분간 머물 요양원을 알아봤다. 꽃마을은 그때까지도 문을 열지 않았고,  코로나 시기여서 대부분 병원이나 요양원도 가족들 면회가 통제되는 때였다. 부부 동반 입소가 가능한 요양원을 알아보고 서울 병원에서 1시간 거리인 가평의 한 요양원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암 치유로 유명한 요양원이기도 해서 한 가닥 희망을 품고 그곳으로 향했다.


요양원에 가기 위해 큰아들이 우리를 데리러 서울 병원으로 왔다. 으로 향하면서도 그가 다시 회생할 거라는 믿음이 한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믿음은 나를 강하게 만들었고, 그에게도 희망을 불어넣었다.


미리 전화해서 예약한 덕분에, 간소한 절차를 마치고 바로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긴 하루였다. 그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세상에 둘만 남은 듯 고요하고 깜깜했다.




하루에 한 번 그의 손을 잡고 요양원 주변을 천천히 산책했다. 기운이 너무 없을 때면 요양원에서 비타민이나 수액을 맞으며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점점 짧은 산책도 힘들어했고 통증 주기도 짧아지고 있었다.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는데 하루는 샐러드 접시를 다 비우곤

"자기가 (잘 먹는 거) 좋아해서 다 먹었어"

입맛이 없는 데도 나를 위해 샐러드를 억지로라도 먹어준 그의 마음이 나를 아프게 했다.

'고마워, 고마워...' 말하면 눈물이 날 거 같아, 기도 같은 내 마음을 몇 번이나 되뇌며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아침에 막내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출근 전에 꽃마을 들러서 초 봉헌하며 기도했어"

꽃마을 입구에는 초를 봉헌할 수 있는 봉헌대가 있었고, 아들은 출근 전 들러 아빠를 위해 기도한 것이다.

막내가 초 봉헌 사진을 보내왔다. 그에게 사진을 보여주니 "기특한 막내"라고 말하며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요양원에서의 6일째, 막내의 대학 졸업식이 있 날이었다. 그날은 진통제로도 통증이 잘 잡히지 않았다.

2월 초 방울토마토를 심을 때만 해도 막내 졸업식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때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하느님 아들들을 만날 수 있도록 조금만 기운을 주소서..." 그는 기도하고 있었다.


큰아들이 가족 대표로 막내 졸업식에 참석했고, 두 아들은 졸업식이 끝나고 요양원으로 왔다. 간신히 기운을 차린 그를 부축해 요양원 밖 정자에서 아들들을 만났다. 작은아들이 학사복과 학사모를 그에게 입혀 주었다. 그는 미소 지었고 그런 아빠를 아들들이 꼭 안아주었다. 우리 은 서로를 꼭 안았다. 그렇게 가평의 한 요양원에서 막내아들의 졸업을 축하했다.



아들들이 돌아가고 그날 밤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열이 난다는 건 다시 응급상황이었다.

꽃마을 신부님께 전화를 걸었다. 너무 막막해서 눈물만 나왔다.

위급한 사정을 말씀드리니, 신부님은 청주로 다시 내려오라고 시며, 청주 병원에서 방법을 찾아보자고 하셨다. 꽃마을 신부님 투병 기간 내내 그를 위해 늘 물씬 양면 애써 주셨는데, 그날도 우리가 차분히 대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청주 병원에 입원이 가능한지 알아봐야 했다. 병원에 전화해서 입원 절차를 물어보니, 열이 38도 이상이면 입원이 힘들고, 코로나 의심 환자로 음압 병실로 가 한다고 했다. 보호자 없이 그곳에서 코로나 검사를 하고, 열이 내릴 때까지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요양원에서 열을 내릴 수 있는 조치가 가능한지 물어오셨다.


요양원 측에 전달하니 내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수액을 놔주었고, 지근한 수건으로 그의 이마와 목 부분을 수시로 닦아주었다.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하며  열을 체크했, 다행히 아침에 미열까지 내.


그는 많이 지쳐 있었다. 전날 거의 먹지 못하고 통증 때문에 힘들어했고, 밤에 열 때문에 고생한 탓인지 기력이 많이 쇠해있는 상태였다. 나는 요양원 측에 119를 불러달라고 부탁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119 대원 두 분이 오셔서 그를 침대에 눕히고 이동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119를 타고 청주로 향했다.


토요일 청주로 향하는 길은, 차들로 가득 차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마치 도로가 주차장 같았다. 혹시라도 가는 길에 '열이 오르면 어쩌지'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119 사이렌 소리를 듣고 그 많은 차가 양쪽으로 점점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 마음이 뭉클해지며 절로 감사의 기도가 나왔다. 덕분에 빠르게 시간을 단축해서 응급실까지 올 수 있었고, 그때 사람들의 배려가 아직도 감동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응급실에 도착했고, 혹시 열이 높아 입원이 안 될까봐 조마조마하며 열을 체크했다. 다행히 열은 37.5도, 입원이 가능한 정도까지 내려와 있었다.


응급실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한 다음 담당 의사 선생님을 기다렸다.




내일을 준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불확실함 속에서 내일을 맞이해야 했다.


 가평에서 막내 졸업을 축하하며..




이전 16화 쓰고 싶지 않은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