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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Jul 22. 2024

쓰고 싶지 않은 이야기

16. 그래도 해야 하는 이야기


꽃마을에 있을 때, 그가 그림을 그려달라고 한 적이 있다. 암이 완치되어 꽃마을 환우들 앞에서 치유기를 발표하는 모습을 그려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꽃마을 성당에서 발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려주었고, 그는 그 그림을 보며 발표할 내용을 미리 메모하고 있었다.




11월 정기검사일이 다가왔다.

일상생활도 잘하고 아들들과 운동도 하며 건강한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그의 체중은 눈에 띄게 빠지고 있었다.


정기검사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린 검사 결과는 우리를 다시 한번 절망시켰다. 

의사 선생님은 모니터를 보여주시며, 간에 전이되었던 암이 커졌고 복부 쪽 전이도 의심된다고 하셨다. 


10개월 가까이 병원 치료도 받지 않고 통증도 없이, 이만큼 일상생활을 잘해온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혹시 모를 응급상황에 대해 설명하셨는데, 황달이 오거나 열이 나면 바로 119를 타고 병원으로 오라고 당부하셨다.


암은 커져 있었고 우리는 2차 항암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 의사 선생님은 치료 확률이 높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방법은 항암밖에 없다고 하셨다. 항암으로 그를 더 힘들게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 깊어졌지만, 다른 대체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었다. 우리는 1차 항암 때 효과가 좋았던 것처럼, 2차 항암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가 잘 이겨내주길 바랄 뿐이었다.


먼저 케모포트를 심었고, 2주에 한 번 2박 3일 동안 오니바이드라는 항암 약을 맞았다. 2차 항암은 1차 항암 때보다 몇 배로 힘들었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견딜 수 있었던 건 힘든 과정 끝에 치유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었다.


그렇게 두 달 동안 4번의 항암을 진행했다. 심리적으로는 투병하며 가장 길게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 설 명절


힘든 고비를 넘기며 한 싸이클의 항암이 끝나고, 그는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그때쯤 설 명절이 다가왔다.


명절 전날 어머님을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왔다. 명절이면 혼자 계신 어머님을 위해 삼 형제가 돌아가며 집으로 모셨는데, 그가 아프면서 그해 추석과 설에는 우리 집으로 오셨다. 어머님도 막내아들이랑 같이 보내고 싶어 하셨고, 무엇보다 그가 어머님과 함께 있길 원했다.


모처럼 오시는 어머님을 위해 메뉴를 궁리하는 나에게,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돈가스를 하라고 남편이 말해주었다. 그가 아프면서 튀기거나 기름진 음식은 안 먹던 우리 집에서도 고소한 기름 냄새가 나는 날이었다.


어머님이 맛있게 잘 드시는 모습을 보며 그의 입가에는 연신 웃음이 번졌다. 어머님이 집에 오신 게 그리 좋은지, 어머님 옆에 붙어있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막내아들의 모습이었다. 잘 먹지 못해 기력이 많이 쇠진해 있었는데도, 그는 식구들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듯 잘 버텨주고 있었다.


막내아들을 끔찍이 사랑하시는 어머님.  딸 같은 막내아들에 딸 같은 며느리가 있어서 딸 많은 집 부럽지 않다고 하시던 어머니, 내 마음이 아무리 아픈들 어머님 마음에 비할까... 그런데도 어머님은 말없이 내 등을 토닥여 주셨다.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같이 자고, 다음 날 아침에 어머님을 모시고 큰형님 댁에 가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항암으로 지쳐있던 그를, 집에서 편히 쉬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머님만 모셔다 드리고 당신은 집에서 좀 쉬면 어때?"라는 내 말에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했고 큰아들이 나서서 나를 설득했다.

"엄마, 아빠는 아무리 아파도 가고 싶지. 아빠가 원하시는 대로 하자. 응?"


가족 모임을 먼저 주도하고 모임 거리를 만들어서 연락하던 사람이 그였다. 그가 얼마나 가족들을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나는 그의 마음을 항상 뒤따라가기 바빴었다. 그런 그에게 가족들을 만나지 말라는 말은 어림도 없는 소리라는 걸 왜 모르겠는가..


그렇게 큰형님 댁으로 향했고, 늘 그랬듯 온 가족이 모였다.

큰형님 댁은 늘 가족들로 붐볐다. 넓은 마당에서 같이 고기를 구워 먹었고, 텃밭에 싱싱한 야채와 채소가 있어 식탁은 늘 풍성했다. 매년 봄이면 그가 좋아하는 방울토마토를 텃밭에 심으시곤 전화하셨다. "언제 오냐, 막내! 얼른 와서 방울토마토 따가라" 큰 아주버님 전화에 우리는 쪼르르 가서 주렁주렁 열린 방울토마토를 신나게 땄고, 큰형님은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타주셨다. 또 가을이면 고구마를 캐서 한 상자 가득 담아 보내주셨다.


큰형님 댁에 도착하니 조카 손주들이 "작은할아버지~!" 하며 그를 반겨주었다. 첫째 조카손자와 둘째 조카손주 삼둥이(세 쌍둥이)가 오랜만에 보니 쑥쑥 자라 있었다. 그는 아이들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으며 예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 "고새 많이 컸네~" 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명절 음식과 사골 떡국이 차려졌고, 나는 그의 음식을 주방 한쪽에서 따로 준비했다. 다들 맛있게 먹고 있는데 고 있는 그가 안쓰러웠다. 항암으로 입맛을 잃어 잘 못 먹을 때였는데 명절 음식을 보니 입맛이 도는 듯했다. 그리고 '먹어도 돼?' 하고 허락을 구하는 그의 눈빛을 외면하지 못했다. 뭐든 먹이고 싶었고, 먹으면 기운이 좀 날까 하는 마음에 같이 명절 음식을 먹자고 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몇 개의 전과 식혜를 맛있게 먹었다.


다른 때 같으면 윷놀이도 하고 떠들썩했을 텐데, 그의 건강을 걱정하며 다소 조용한 명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식사 후 잠시 누워있겠다며 방에 간지 얼마쯤 지났을 때, 그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후다닥 방으로 달려 들어갔고 아파하는 그를 부축했다. 그렇게 아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놀란 나는 그를 안고 그가 괜찮아지기를 기다렸다. 진통제를 먹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간신히 안정을 찾았다. 아직 설 연휴는 남아있었지만 우리는 걱정하는 집안 식구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일주일 후가 정기검진이어서 그때까지 잘 버티고, 치료받으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4일이 지났을까... 아직 정기검진까지는 조금 남아있던 그때, 아침에 일어났는데 눈이 노래지고 소변 색도 엄청 노랗게 나왔다. 황달이었다. 놀란 나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응급실에 갈 준비를 했다.


우리는 119를 타고 서울 병원으로 향했다.


우선 황달을 잡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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