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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윤이 Apr 05. 2020

코로나 19와 함께 온 시간(8)

나는 내일을 사랑한다.



꽃잎이 속삭이는 소리에 

밤잠을 뒤척이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새싹들이 나오며 터트리는 

폭죽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19년 전 4월 어느 날 우연히 내 눈에 띈 1학년 개구쟁이 이야기를 해야겠다.

아들이 1학년이어서 반 교실 청소를 하게 되었다. 교실엔 담임선생님과 남자아이 두 명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컴퓨터로 사무를 보시는 것 같았고, 두 아이는 시험문제를 풀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나머지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청소당번인 엄마들이 들어가니까 선생님께서는 교무실로 가시고 두 아이는 엉겨 붙어서 싸우고 있었다.  한 명은 아는 집 아이였고, 한 명은 처음 보는 아이였는데 모르는 아이가 어떤 가정의 아이인가가 궁금해졌다. 우연이랄까 내가 자주 가는 슈퍼 여주인의 조카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언니 집 가까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 그 아이가 나머지 공부를 하던데 내가 돌봐줘도 되겠냐고 엄마에게 물어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물론 수업료는 무료로 해주겠다고 했다. 

새싹이 나오는 나무들


그다음 주부터 그 아이는 나와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나머지 공부 과목이 수학이어서 수학을 가르치는데 4+8=이란 문제가 있으면 고개를 들어 천정을 한참 바라본 다음에 답을 쓰는데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아이는 엄마가 일을 해야 아이들을 키울 수가 있어서 학습지를 시키고 있었는데 학습지 교사가 손가락을 사용하지 말고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라고 해서 그렇게 한다고 했다. 물론 엄마는 학습지 교사가 잘하고 있다고 하니까 보지도 않고 잘하는데 왜 아이가 나머지 공부를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하루는 엄마한테 아이가 공부하는 것을 보여 줬다. 그 과정을  알게된 엄마는 깜짝 놀라며 그때부터  나를 믿고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 

진달래 꽃동산

 어느 날 아이들 학교 숙제가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한 일 중에서 기억에 남는 일을 그림일기로 써오는 숙제였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어떻게 표현해 주어야 할지 난감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빠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라고 했더니 아빠가 병원에 누워계신 모습만 생각이 난다고 했다. 그래서 너는 아빠가 있다고 생각하니? 없다고 생각하니?  하고 물어봤다. 아이는 "아빠가 죽었으니까 아빠가 없지요"라고 대답을 해서 아이의 기억 속에 아빠가  돌아가셨지만 아빠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비가 오는 날 아빠랑 우산을 쓰고 가는 것을 상상해 보라고 했다. 그런데 아빠가 없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해서 아빠가 우산을 잡고 너는 아빠의 팔을 잡고 걷는다고 생각해봐, 아빠는 돌아가셨지만 네가 원하면 너의 상상 속으로 언제든지 오셔서 함께 할 수가 있어 했더니 아이의 얼굴에 기쁨이  솟아나는 것이 보였다. 그날 그 아이는 그림일기장에 커다란 우산을 그리고 키가 큰 아빠와 키가 작은 아들이 함께 우산을 잡고 빗속을 걸어가는 그림을 그리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나는 아빠와 함께 우산을 쓰고 학교를 갔다. 이렇게 썼다. 담임 선생님께서 하루는 그 아이를 불러서 너는 아빠가 안 계신데 어떻게 아빠랑 우산을 쓰고 학교에 왔다고 거짓으로 일기를 썼느냐고 물어보셨는데, 아이가 말하길 저도 아빠가 돌아가시면  아빠가 없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 상상 속에 아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려서 담임 선생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하시며  엄마에게 전화를 하셔서 담임선생님은 단순히 가정에 새로운 아빠가 생겼겠구나 해서 물어본 것인데 마음이 짠했다고 하셨다며 그달의 일기왕은 그 아이가 상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활짝 핀 벚꽃

그 아이가 3학년이 되었을 때는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밝아서 담임 선생님이 너무 예뻐해서 같은 반인 내 아들 녀석이 질투를 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공부를 잘하게 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저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이 누구일까가 궁금해지고 있었다. 그쯤  그 아이는 청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아이와 나는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 후 그 아이의 슈퍼 하는 이모 덕분에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지금까지 나는 공부방을 운영하게 된 거였다. 공부방을 어떻게서 하게 되었느냐고 물은 친구가 옆에서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산길을 걷다가 "공부방을 하고 싶은 생각이  아니었는데 그 아이일로 해서 지금까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하게 되었구나!" 해서 나는 지금 코로나 19로 인해 그리고 딸아이가 자가 격리자가 되면서 수업을 중단하고 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큼 내 일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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