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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 죽을 리본 장수

by vakejun


아이는 같은 반 친구가 신고 왔던 리본 달린 '여자'고무신을 부러워했다.


"아부지요, 제발 이번 장에 나가면 껌정고무신 말고 리본 달린 고무신 사줘요. 제발요, 알았지요?"


오냐, 알았다!


이번엔 필히 고운 리본이 놓인 신발을 신고 자랑을 해야지, 나도 이제 다른 머스마들이 신는 껌정고무신에서 탈출해야지!

장에서 돌아올 아부지만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이럴 수가!

아이가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막걸리를 걸쭉하게 걸치신 아부지는 새카만 고무신을 내놓으셨다.


이게 어찌 된 일인고 하니,

"야야, 내가 온 시장을 다 뒤져봐도 껌정고무신 파는 장수 말고는 다 얼어 죽었더라. 내 담에는 꼭 사 오마."


아무리 날씨가 춥기로서니 리본 달린 신발장수만 얼어 죽었다니.. 아이는 아부지도 신발장수도 혹독한 겨울도 너무나 야속했다.


어매는 몸이 약해 할줄 아는 거라곤 그저 큰 엄마 댁에 놀러 가기. 형제는 자신을 합해 훗날 모두 열이 되었다.


아부지는 일하는 하인도 두고 살만한 형편이어서 살림은 자식들에게 맡겼다. 큰 자식들이 어린 형제들을 돌보고 부엌일을 했다. 어매가 상관 않는 집안 살림에 아부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매는 사실 안 죽고 버틴 것이 용하다 할 만큼 약골이었다. 온갖 방법을 다 써봤지만 급기야 시름시름 앓자 친척이 최후통첩을 써 보기로 했단다.


"자네, 담배 한번 태워볼런가?"


어매는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있다가 이게 뭔 소린가 싶었지만 도전해 보기로 했다.

담배가 몸에 맞을라나..그렇게 활기를 되찾고 살기만 하면 됐다며 아부지는 아무 말 없으셨다고 했다.




엄마는 다음 장날에도 간곡하게 부탁했다.


"아부지, 제발요. 껌정고무신 말고 요렇게 요렇게 리본 달린 신발 하나만 사줘요. 내가 애들도 더 잘 볼게요."

안 하던 애교까지 부려가며 외할아버지를 설득했다.


"오냐 알았다! 내 이번엔 진짜 사오께!"


진정 믿었다.

외할아버지가 사 온 리본 달린 신을 신고 내 앞에서 자랑질을 하던 친구의 얼굴을 납작하게 해 주고, 여시 같은 이모에게 뺏기지 않도록 계획도 세웠다.


집안 살림과 시장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던 외할머니는 연초를 피워가며 딸의 소원해마지 않던 간절한 부탁을 알런지 모르는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숱하게 많은 자식들이 있음에도 배 하나는 곯지 않았다고 했다. 농사를 지어보지 않아 그게 얼마나 힘든지 몰랐다고 했다. 그저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소박하게 리본이 있는 고무신 하나 바라는 게 전부인지라, 농사짓는 집으로 시집가게 된 걸 평생 후회한다고 했다.


나중 엄마의 기억을 편집해 완성해 보니 아빠는 엄마를 보고 반해 엄청난 구애를 시도, 불같은 외할아버지를 피해 몰래 만남을 몇 번, 여시 같은 이모의 도움으로 둘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엄마는 이모도 싫다고 하셨다.

내가 봤을 땐 둘 다 얼굴을 몹시 따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 겨울 모든 리본 신발장수는 역시나 다 얼어 죽었고 또 껌정고무신을 신게 되었는데, 순진했던 엄마는 외할버지의 거짓말에 한탄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중 자식 낳아 길러보니 그제야 이해가 간다고 하셨다.


그 많은 자식들,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해줄 수 없었던 결정이었을 아비의 심정에 대해.



호랑이 같던 외할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중풍이 왔고 외할머니는 젊어서 안 하던 집안살림과 병간호를 하게 되었다.


방학이었는지 휴가였는지 가물하던 그때, 아빠는 외가댁에 전해드릴 게 있다며 나선다고 했다.

"너도 갈래?"


나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응했다.


"하기야.. 지금 안 보면 언제 볼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표현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백발의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이가 몇 개 빠진 웃음으로 우리를 반겼지만 사위와 손녀를 알아보시지는 못하셨다.


엄마는 그 웃음도, 몇째 딸 누구인지도 어쩌면 모를 외할아버지의 모습을 마주하지 않았다. 다만 날 알아보시더냐고만 물어왔다.


검정고무신 이야기는 어릴 때부터 많이 들어왔지만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외할아버지에 대한 원망보다는 그리움의 내막이라는 걸 안다.


엄마는 외할머니보다 외할아버지가 사실 더 좋다고 했다.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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