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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개구리

by vakejun


스무 살 대학 때 기숙사에서, 그리고 같은과여서 만난 동기 4명이 똘똘 뭉쳤다.


고등학교 때의 친분만을 과시하던, 그 안에서도 항상 둘만 단짝이고 싶어 했던 어린애 장난 같은 친구놀이가 아니라, 진짜 누구와 섞여도 잘만 어울리던 4명이었다.


좋은 건 꼭 오래가지 않는 속성이 있나 보다.


캐릭터가 강한 4명은 시간이 지나자 본인의 상황과 취미를 따라 흝어졌다.


줏대 있고 주변을 항상 케어하는 어른 같던 친구는 칼보다 강한 펜을 찾아 신문동아리에 들어 평일에는 동아리 활동,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모든 것에 열심이던 친구는 둘째의 치이는 삶이란 이런 거다-라고 본인에게 엄격한 시간만을 고집했다.


날 제외, 두 종류의 여우과가 남았다.

(비난하지 않는다)


첫 번째 여우는 남자사람들이 좋아할법한 얼굴에 애교 있고 차분한 성격으로 그에 걸맞은 연애를 하느라 늘 바빴다. 남자 동기들의 애정공세에 바쁠 만도 하다.


두 번째 여우는.. 여우인 줄 알았지만 세월을 같이 통과해 본 결과 심한 '애정결핍'인 걸로 결론이 났다.

이 친구 역시 연애에 가담을 했고 결핍이 애정인지라 작은 관심과 친절에도 모든 걸 올인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4명이 함께 모이는 날은 극히 드물었다.



연애도 사람도 관심이 없다.

갈 곳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학교에서 제일 쾌적하고 혼자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공간을 물색했다.


도서관.

낯선데 썩 나쁘지 않다.


교과서 외에 책을 가까이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패션에 관심이 많아서 언니가 늘 사다 주는 패션매거진이 전부였지.

내가 도서관이라니?


재미있는 걸 찾아본다.


디자인과랍시고 디자인 매거진부터 뒤졌다.

세상에! 학교가 주는 복지는 이런 거구만?

공짜로 써도 되나 싶다.


디자인 서적은 꽤나 많았고 아이디어 스케치에 영감을 더했다.

우물 안 개구리는 도서관이 던져주는 돌을 열심히 닦았다.


내 것으로 만들자.


메모하는 습관이 나쁘지 않다.

몰두하는 나의 모습 또한 멋있다.

언젠가 써먹을 수 있는 기똥찬 카피가 떠오른다!

이번 학점은 내가 과탑이다.

공모전에 쓸만한 무언가를 건지려고 뒤적이고 쓰고 그리기를 반복했다.


세명의 친구는 나름의 사정으로 여전히 바빴고 할 게 없던 나는 그렇게 도서관에 짱박혀 연마 아닌 연마를 재미지게도 했다.



훗날 서울의 교보문고를 만났을 때를 생각하니 시골개구리 출세했네 싶다.

도서관의 개구리는 용케도 큰 물을 만났다.


교보문고에서 3~4시간을 죽친다.

고전문학, 필독서, 베스트셀러, 경제, 상식..

재미가 없다.

난 책을 잘 읽지 않는다.


디자인 서적 코너에서 아픈 다리를 번갈아 짝다리를 짚어가며 보고 또 본다.

예의상 뭐 하나는 사줘야지.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가기도 아쉽다.

제일 잘 읽히고 좋아하는 일러스트 삽화가 있는 영화주간지 하나를 산다.



친구가 외치던 강한 펜은 바늘로 변신해 성공한 스타일리스트가 되었고,

연애경험을 토대로 좋은 짝을 만난 친구는 아이까지 낳아 국가의 힘이 되었고,

애정결핍은 마침내 진정한 결핍을 채워 줄 상대를 만나 무소식이 희소식이 되었다.



도서관을 떠난 큰 물에서의 헤엄은 철학까진 모르겠고 심리적으로 모든 게 간파가 가능했던, 그래서 더 힘들었던 사회생활을 떠안겨 주었다.


후에도 결코 쉽지만은 않은 '받아들임'의 연속들이 치열하게도 싸움을 강요했던 것 같다.

모든 게 부질없을 때의 나는 다시 우물과 우울 안에 갇히고 말았던 거다.


싸움은 끝났다.


무언가 조금 읽힐 무렵,

교보문고에 간다.

마음에 드는 거 있나 볼까? 하고 찾는 게 난 이제 평화롭다는 사인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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