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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May 07. 2023

과거 여행

제주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돌담이다. 구멍이 숭숭 뚫린 새까만 현무암을 얼기설기 쌓아 올린 돌담 옆을 걷다 보면, 살아보지도 않는 먼 과거 어딘가에 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마치 반복적으로 태어난 끝에 지금을 살고 있지만, 조금씩 남아있던 내 과거의 분신들이 얽히고설켜 있는 흔적을 만나는 듯한 느낌.


나는 아주 오래전 이곳에서 배를 타고 나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았거나,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땅을 힘껏 달리다 넘어져 우는 아이였거나, 편평한 돌 위에 잠시 걸터앉아 지친 다리를 쉬게 하는 노인이지 않았을까.

어느 집 밭이라고 쌓아 올린 밭담이든, 우리 집이니 들어오지 말라고 쌓아 올린 집담이든, 그것도 아니면 우리 아버지의 묘라고 쌓아 올린 산담이든, 나는 이 담을 쌓아 올린 이들 중 하나가 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착각도 한다. 돌담과 구름 몇 점 있는 저 맑은 하늘은 오랜 세월 같은 모습으로 저기에 머물러, 지금은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기억하는 듯하다. 그러니 돌담 옆을 지나다 보면 희미한 기억의 파편이 불쑥불쑥 찾아든다. 하지만 기억해 내려 노력하지 않는다. 잊은 채 사는 지금도 또 과거가 될 테니.


제주가 고향인 작가에게 돌담은 현실의 풍경이다. 현실의 풍경 속엔 그가 꾸었던 현실의 꿈이 굽이굽이 스며들어 있다. 다시 찾아간 그곳에서 그는 여전히 푸른 하늘과 중늙은이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맞는 돌담을 만난다. 그렇게 여기서 과거 꿈의 기록을 꺼내 본다. 외지인의 과거 여행과는 사뭇 다른 모습일 것이다.


           박은성, <돌담>, 캔버스에 아크릴, 90.9 x 72.7cm,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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