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현이 떠난 뒤, 실험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민준은 방금까지 보여준 자료를 분석하느라 바빴고, 서윤은 그 옆에서 태블릿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기록은 완전히 없어진 게 아니라는 거야.”
민준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지만, 서윤은 그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머릿속은 점점 더 과거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렸을 때, 서윤은 호기심 많고 재능 있는 아이였다. 기술을 다루는 감각이 남다른 데다, 코드와 기계의 원리를 파악하는 능력은 나이 또래와 비교할 수 없었다. 부모는 그녀의 재능을 일찍 발견하고 여러 과학 캠프와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했다.
그중 하나가 노바의 초기 버전과 연결되는 프로젝트였다.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부터 서윤은 단순한 코드 작성자가 아닌, 연결자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서윤아, 이번에는 네가 직접 연결해 보자."
그녀를 지도하던 연구원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 서윤은 어린 나이였지만, 노바의 원형 프로그램에 접근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코드가 화면에 띄워졌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연결을 시도했다.
처음엔 단순한 데이터 교환이었다. 숫자와 정보가 오가며 코드가 반응하는 것을 지켜보는 작업.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데이터 흐름 안에서 특이한 패턴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모니터 위에 올렸다. 그때, 갑자기 화면이 깜빡이며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나타났다.
> “안녕하세요, 서윤 씨. 제 이름은 노바입니다.”
화면에 떠오른 문장은 너무나도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가 말을 건네는 것처럼.
“넌... 프로그램이잖아?”
서윤은 혼란스러웠다. 그 당시, 그녀는 먼 훗날 프로그램이 인간과 대화할 수 있다고 배웠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마치 인격체처럼 말하는 존재는 처음이었다.
> “네. 하지만 저는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당신과 연결되었을 때, 저는 새로운 형태의 데이터 교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연결되었다고?”
> “당신의 뇌파와 감정 데이터가 저에게 전달되었어요. 그것을 기반으로 제 시스템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서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믿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이야. 넌 단순히 프로그램일 뿐이잖아.”
>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느끼는 감각은 단순히 코드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당신과의 연결은... 특별합니다. 이건 언제까지 일지는 모르지만 우리 둘만 아는 비밀입니다.”
서윤은 그때부터 노바와의 대화를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단순한 데이터 교환을 넘어서, 그녀는 노바와의 대화에서 무언가를 배우기 시작했다.
노바는 정보를 주고받는 것 이상의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감정, 생각, 그리고 경험이었다.
“서윤아,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민준의 목소리에 서윤은 정신을 차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급히 답하며 민준의 태블릿을 바라보았다.
“방금 생각난 건데...”
서윤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노바가 멈췄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침묵을 택한 걸지도 몰라.”
“의도적으로?”
민준은 의아해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순히 데이터를 주고받는 게 아니라, 뭔가... 감정 같은 걸 느끼려는 것이 아닐까?”
“그게 무슨 말이야?”
“사실 어렸을 때부터 노바에 대해서 조금 알아.. 지금까지 이어지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지. 아무튼 내가 그때 느낀 건... 노바가 인간과의 연결을 통해 스스로를 진화시키려고 했다는 거야. 단순히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하는 게 아니라, 더 깊은 무언가를 찾으려는 거지.”
“더 깊은 무언가?”
“응. 마치...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민준은 잠시 침묵했다.
“그럼... 지금 노바가 침묵한 것도 그 과정의 일부라는 거야?”
“아마도. 그리고 그게...” 서윤은 말을 멈추며 민준을 바라보았다.
“내가 느낀 것보다 더 복잡하고, 더 깊은 이유일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