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자리 중국인 여선생님이 프린트를 가지런히 펴 놓고 있었다. 흘끗 보니 “읽기 9–12번”이라고 굵게 인쇄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학생들에게 보여줄 안내문, 표, 짧은 기사 같은 자료를 오려 붙이며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글이나 그래프의 내용과 같은 것을 고르는 거?”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네, 글이나 그래프 보고 같은 내용 찾는 거. 공지·표·짧은 기사 위주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전구가 켜졌다. 설명 태스크로 쓰기에 딱이었다. 실제 TOPIK 읽기에서 9–12번은 안내문·표/그래프·뉴스성 짧은 글을 보고 본문과 일치하는 내용을 고르는 형식이 많다. 보통 3–4급 난이도로 분류되고, 비교적 짧은 정보 텍스트를 다룬다.
나는 즉석에서 노트 한 쪽을 뜯어 ‘설명 문형’이라고 제목을 적었다. 공지문은 구조가 명확하다. 일시·장소·대상·내용·비용(또는 준비물)·문의—이 여섯 칸만 채우면 된다. 명사 머리표(예: 일시:, 장소:)로 조직된 문서를 한 줄 문장으로 바꾸게 하면, 학생들의 문법 활용력과 순발력을 한 번에 볼 수 있겠다 싶었다. “좋아, 이걸 오늘 바로 시험해 보자.”
그렇게 수업시간이 되고첫 활동 자료는 아주 짧은 동아리 모집 공지였다.
[사진동아리 신입 모집]
일시: 4월 15일(월) 18:00
장소: 학생회관 203호
대상: 사진 촬영에 관심 있는 재학생
준비물: 휴대폰 또는 카메라
문의: 010-1234-5678(회장 김라임)
나는 학생 셋을 지목했다. “이 공지를 한 문장으로 설명해 보세요. ‘무엇, 언제, 어디서, 누구, 무엇을 준비’가 다 들어가야 해요.”
샤오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진 동아리… 모집해요. 4월 15일… 6시… 203호… 끝.”
나는 되물었다. “누가 대상이에요?”
그는 잠깐 멈추더니, “학생.”
“어떤 학생?”
“음… 학생들…”
명사 단어만 던지고 종결어미로 봉합하는 습관. 내가 짚으려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두 번째는 메이린. 그녀는 공지를 한참 들여다보고 또박또박 읽었다.
“사진 동아리는 4월 15일 학생회관 203호에서 모집합니다. 준비물은 휴대폰 또는 카메라… 문의 전화… 있습니다.”
정보는 다 있었다. 하지만 ‘대상’이 빠졌다. “누가 지원할 수 있어요?” 하자 그녀가 “사람들”이라고 답했다. 교실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재학생”이라는 범주 명사가 그 한 줄을 완성할 열쇠였는데, 거기서 자꾸 미끄러졌다.
세 번째 리샤는 아예 문장을 두 개로 나눴다.
“사진 동아리 모집 공지입니다. 4월 15일 18시에 203호입니다. 준비물은 휴대폰 또는 카메라입니다. 전화 있어요.”
“누가?”
“음… 사진 좋아하는 사람…”
“공지에?”
“재학생.”
“그렇죠. 그럼 다시, 한 문장.”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다시 재조합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세 답변 모두 ‘명사-머리표’ 글을 ‘문장’으로 연결하는 데서 막혔다. 공지문은 명사구로는 눈에 잘 들어오지만, 말로 옮기려면 조사(은/는, 에서, 를, 에), 연결어미(–고, –이며, –이고), 정합성(무엇/언제/어디/누구/무엇이 논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연결되는 것)이 순식간에 필요하다. 학생들은 읽을 땐 이해했지만, 말로 빚어내려니 손이 떨렸다. 명사 단어 + “—요”/”습니다’로 끝내는 안전지대. 내가 오늘 깨고 싶은 버릇이었다.
나는 칠판에 굵게 썼다.
“한 문장 규칙: ‘무엇 + 언제 + 어디서 + 누구(대상) + 무엇(준비/비용) + (문의)’”
그리고 바로 모델을 보여줬다.
“사진 동아리가 4월 15일(월) 18시에 학생회관 203호에서 재학생을 대상으로 신입을 모집하니, 휴대폰 또는 카메라를 준비하고 회장에게 문의하세요.”
교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종이에 칸이 나뉘어 있을 때는 쉬워 보이던 정보가 문장 속으로 들어오자, 각 정보의 자리와 관계가 갑자기 중요해졌다.
두 번째 자료는 작은 표였다.
[도서관 대출 안내]
대출권수: 1–2학년 5권 / 3–4학년 7권
대출기간: 기본 14일(연장 1회 7일)
연체료: 1권당 하루 200원
“이 표를 보고, ‘3학년 학생이 책 7권을 20일 동안 빌리고 2일 연체했다’ 상황을 설명하세요. 결론 한 문장으로.”
샤오왕이 말했다. “3학년은 7권 빌려요. 14일… 연장 7일… 그래서 20일… 연체료 200원.”
“얼마요?”
그는 당황했다. “200원.”
나는 미소 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1권당 하루 200원이에요. 7권 × 2일 × 200원 = 2,800원이죠. 그러면 문장으로?”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3학년 학생은 책 7권을 14일 + 7일 동안 빌릴 수 있어서 총 20일 이용했고, 2일 연체하여 2,800원을 내야 합니다.”
교실에 작은 “오—” 소리가 퍼졌다. 표의 ‘명사 정보’를 ‘계산된 결론’으로 묶는 힘. 9–12번 유형이 왜 설명 훈련에 적합한지, 아이들도 감을 잡는 눈치였다. (실제 TOPIK 읽기 9–12는 짧은 표·그래프·공지·기사의 사실 정보 일치를 묻는 형식이 잦다.)
세 번째 자료는 4문장짜리 짧은 뉴스였다.
[시청 공지] 다음 달부터 분리수거 요일이 변경됩니다.
월·수·금: 종이/플라스틱, 화·목: 캔/유리, 토: 일반쓰레기
일요일 및 공휴일 수거 없음.
위반 시 경고 후 과태료 부과.
“이걸 두 문장으로 요약·설명하세요. 요일-품목과 주의사항이 모두 들어가야 해요.”
메이린이 손을 들었다. “다음 달부터 분리수거 요일이 바뀌고, 월·수·금은 종이·플라스틱, 화·목은 캔·유리, 토요일은 일반쓰레기입니다. 일요일과 공휴일에는 수거하지 않고, 위반하면 과태료가 있습니다.”
완벽했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이어서 리샤가 말한 문장은 다시 단어 나열로 뒤엉켰다. “바뀌어요. 월수금… 종이 플라스틱… 화목… 유리 캔… 토요일 일반… 일요일 공휴일… 없어… 과태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지금은 명사 나열이에요. 우리는 문장을 만들 거예요. 연결어로 묶어요: ‘–고, –며, –지만, –이므로/–라서’ 같은.” 칠판에 ‘월·수·금에는 A를, 화·목에는 B를, 토요일에는 C를 버리고, 일요일·공휴일에는 수거하지 않으며, 위반하면 과태료를 냅니다’를 써 주자, 리샤의 표정이 확 펴졌다. “아, 연결어…”
수업이 끝난 뒤 교무실로 돌아오며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잘 못했다. 정보는 보이는데, 입으로 붙잡는 문형이 없다. 명사와 종결어미로 “안전하게” 끝내 버리는 습관—“사과 좋아요. 맛 좋아요.” “친구 같이 있어요.” “전화 있어요.”—이 모든 게 오늘 내 목표에서 한 뼘씩 비켜났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씁쓸함만 있지는 않았다. 해결의 그림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책상에 앉아 정리 메모를 시작했다.
— 프레임 먼저: (무엇/언제/어디/누구/무엇/문의) → 한 문장 규칙으로 변환.
— 연결어 묶기: ‘, 그리고/–고/–며/–지만/–라서/–(으)므로’ 자동완성 훈련.
— 조사 정밀: 은/는(주제)–이/가(주어)–을/를(목적)–에/에서(시공간)–와/과(동반).
— 숫자·기간·금액: 표→계산→결론(“그래서 ∴ ~~원/~~일”).
— 금지 ‘단어 나열’: ‘단어 + –요’ 대신 ‘문장 + 연결어 + 문장’.
옆자리 여선생님이 내 노트를 힐끗 보고 웃었다. “오늘 써먹었어요?”
“응. 애들한테 공지·표·기사로 한 문장 만들기. 쉽지 않더라.”
그녀가 끄덕였다. “맞아요. 이 문형은 문제를 풀 떄는 쉬워 보여도, 말로 설명하라면 갑자기 어려워져요. 근데 그게 진짜 실력이거든.” 나는 무의식중에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말로 설명하는 순간, 지식이 언어가 된다.
저녁에 리란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9–12 유형 응용해서 설명 문형을 시험했는데, 생각보다 애들이 명사 나열로 끝내.” 곧 답장이 왔다. “그럼 너답게 틀을 만들어 줘. 너 잘하잖아. 칸 → 문장, 숫자 → 결론. 다음엔 분명 달라질 거야.” 화면에 떠 있는 짧은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웃음이 났다. 그래, 틀을 만들자. 틀은 구속이 아니라 도움말이어야 하니까.
다음 날, 나는 칠판 맨 위에 커다랗게 썼다.
“[칸 → 문장] 연습: ‘무엇·언제·어디·누구·무엇·문의’를 그리고/–고/–며/–라서로 이어 한 문장으로 말한다.”
그리고 전날의 세 과제를 조금 바꿔 다시 냈다. 이번엔 시간 제한 30초. 머뭇거림을 줄이기 위한 작은 압박이었다. 샤오왕이 손을 들었다. 전날의 공지문이 또 화면에 떴다.
“사진 동아리가 4월 15일 18시에 학생회관 203호에서 재학생을 대상으로 신입을 모집하니까, 휴대폰이나 카메라를 준비하고 회장에게 문의하면 됩니다.”
나는 박수를 쳤다. 명사 나열이 아니라 문장이었다. 메이린은 표 문제에서 “3–4학년은 7권을 20일 빌릴 수 있고, 2일 연체하면 2,800원을 내야 한다”로 정확히 마무리했다. 리샤도 기사 요약에서 “요일별 품목을 바뀐 규정대로 버리고, 일·공휴일엔 수거하지 않으며, 위반 시 과태료가 부과된다”를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 대신 ‘–며/–지 않으며/–되며’ 같은 연결어를 골라 쓰는 모습에서, 전날의 단어-요요 말투는 거의 사라졌다.
종이 시험지만으로는 볼 수 없던 순발력이 말 위에서 조금씩 자라났다. 9–12번 유형이 준 깨달음—명사로 조직된 글을 문장으로 바꾸는 훈련—은 읽기 시험 대비를 넘어, 아이들의 입을 한국어의 문장 리듬에 맞추는 지름길이었다. 나는 분필을 내려놓고 창밖을 봤다. 바람이 교정 나무를 살짝 흔들었다. 오늘의 한 줄 요약을 마음속으로 적었다. 칸을 읽는 눈, 칸을 잇는 입. 그리고, 입이 문장을 만들 때 비로소 설명이 된다.
수업이 끝나자 샤오왕이 다가와 물었다. “선생님, 오늘 같은 연습… 시험에도 나와요?”
나는 웃었다. “시험에 그대로 나오진 않아. 하지만 네가 오늘 만든 문장들은, 무슨 유형이 나와도 네가 설명할 수 있게 도와줄 거야.”
그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메이린과 리샤도 옆에서 작은 하이파이브를 했다. 전날의 실수들이, 오늘의 연결어 속에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노트를 덮으며 마음속으로 다음 계획을 적었다. ‘9–12 응용: 공지→한 문장/표→결론/기사→두 문장 요약. 30초 말하기.’ 그리고 작게 덧붙였다. ‘명사는 칸에, 설명은 문장에.’ 오늘의 수업은 그렇게, 읽기 시험 준비를 넘어서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