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와 발음 사이, 그 틈을 메우며

by leolee

교무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책상 위에 교재와 공책, 그리고 노트북을 가득 펼쳐 놓고 있었다. 연필로 줄을 그었다 지우개로 지웠다를 반복하다 보니 책상 위는 금세 지우개 똥으로 어지러워졌다. 단순히 “ㄱ, ㄴ, ㄷ” 같은 글자만 읽히는 문제를 내려고 했던 초기 구상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건 아니지. 3–4급 학생들에게 글자 읽기만 시키면 시험이 아니라 놀이잖아.”


스스로 중얼거리며 다시 문제지를 구상했다. 실제 한국어는 사실 외국인에게 ‘보이는 대로 읽히지 않는 언어’였다. 한국 학생들도 초등학교 때 배우는 발음 규칙을, 성인이 된 지금도 무의식적으로 적용한다. 하지만 외국인 학습자, 특히 중국 학생들에게는 하나의 과목으로 느껴지는 한국어의 받침과 음운 변화가 낯설고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먼저 연음 현상을 떠올렸다. 가장 기본적이지만 막상 읽으라 하면 절반은 틀렸다.


“저는 오늘 학교에 가요.”

‘학교에’를 자연스럽게 [학꾜에]라고 이어야 하는데, 많은 학생들이 [학교에]라고 읽었다.


조금 더 난도를 올려, ㄴ 첨가를 집어넣었다.


“공공요금은 밀리면 안 돼요.”

‘공공요금은‘이 그대로 [공공요금은]이 아니라 [공공뇨그믄]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이 부분은 한국인조차도 무의식적으로 맞게 읽지만 막상 읽어 보라고 하면 틀리거나 평소와 다르게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거센소리 되기도 꼭 필요했다.


“책을 찾다가 친구를 만났어요.”

대부분 학생들은 [찯따가]라고 발음했는데, 실제 발음은 [차따가]에 가까웠다.이 이유는 특별히 중요한 상황이 아닌 연음의 경우 대부분 받침‘ㄷ’의 발음보다는 다음 자음의 거센소리 표현에 집중하는 게 좋기 때문이다. 모든 발음은 더 쉽게, 하지만 의미전달이 정확해야 하니까.

유음화는 특히 중국 학생들이 약한 부분이었다.


“서울 사람들은 설날에 떡국을 먹습니다.”

교재에 그대로 적힌 대로 [설날]이라고 읽는 게 아니라 [설랄]이라고 읽혀야 했다.


나는 이 문장들을 공책에 차곡차곡 옮겨 적었다. 각 음운 현상마다 문장을 3개 이상 준비해 두었는데, 학생들이 실제 시험에서 한 문장을 읽으면 그들의 발음 습관이 드러나도록 설계하려 했다.


옆자리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중국인 선생이 내 메모를 흘끗 보았다.

“이 선생님, 지금 뭐 하고 계세요?”

“발음 시험 문제를 만들고 있어요. 음운 변화를 골고루 넣으려고요.”


그녀는 웃으며 내가 쓴 문장 중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소리 내어 읽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와… 이거 나도 읽기 어렵네. 특히 이거, ‘서울역 앞에 있는 약국에…’ 이건 [서우력]이에요? 아닌 거 같은데...”

나는 순간 당황했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별것 아닌 문장이었다.


“아, 이건 두 가지가 들어가요. ㄴ 첨가와 유음화. 그래서 [서울력] 이렇게요.”


하지만 한국어를 배우는 입장에서는 난도가 급상승하는 순간이었다. 수준이 높고 낮음을 떠나, 경험이 없으면 누구나 헷갈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오히려 학생들이 시험장에서 얼마나 긴장할지 떠올라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날 오후 수업 시간, 나는 준비 중인 문제 몇 개를 학생들에게 미리 시범 삼아 읽히게 했다.

“여러분, 한국어는 글자 그대로 읽으면 안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시험에선 이런 문장을 읽게 될 거예요. 예를 들어, ‘서울 사람들은 설날에 떡국을 먹습니다’… 자, 누가 읽어볼까요?”


샤오왕이 손을 들고 읽었는데, 예상대로 [설날]이라고 또렷하게 발음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런데 실제 발음은 [설랄]에 가까워요. 받침 ㄹ과 초성 ㄴ이 만나면 이렇게 바뀌죠. 그래서 [설라레]라고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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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웅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학생은 “와, 진짜 어렵다…”라며 한숨을 쉬었고, 어떤 학생은 웃으며 다시 따라 읽으려 애썼다. 그 모습을 보며, 이번 시험이 단순한 평가가 아니라 그들의 발음을 교정하고 실력을 한 단계 올려주는 계기가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나는 웨이신을 열어 리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발음 시험 문제를 만들었는데, 중국 선생님도 어렵다고 하더라. 학생들한테도 시켜봤는데 다들 힘들어했어.”

잠시 후 답장이 왔다.


“그만큼 네가 제대로 문제를 만들고 있다는 거 아니야? 학생들이 어렵게 느껴야 배울 수 있지. 나중에 나도 시험 삼아 읽어볼게.”


그녀의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내 노력을 인정해 주는 확신 어린 격려였다. 순간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 길이 맞구나.’ 혼자였다면 금세 지쳐버렸을 준비 과정이, 그녀의 말 덕분에 의미 있는 시간으로 바뀌어 갔다.


그날 밤, 책상 위에 쌓인 문장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서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발음은 단순히 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자신감을 키워주는 거다. 학생들이 이 시험을 통해 스스로 성장했다는 걸 느끼게 해 주자.”


문장을 고르고 다듬는 일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설레었다. 이제 막 시작된 이 작은 시험이, 학생들의 인생을 바꾸는 발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를 끝없이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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