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by leolee

리란과 함께 걷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나는 마음 한쪽에 작은 빚 같은 걸 느꼈다. 그녀는 늘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주었다. 가족과 직장, 어린 시절의 기억, 그리고 힘들었던 순간까지도 숨김없이 털어놓곤 했다. 그런데 나는 늘 듣는 쪽에만 머물러 있었다. 함께 웃어주고 위로해 주긴 했지만, 정작 내 과거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는 나도 그녀에게 내 시간을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말로 풀어놓는 대신, 그 일이 있었던 장소로 그녀를 데리고 가서 직접 내 기억을 들려주기로 했다. 그래야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그녀가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번째로 데려간 곳은 5·4 광장이었다. 저녁 무렵, 광장은 붉게 물드는 노을과 세찬 바닷바람으로 가득했다. 거대한 ‘五月的风’ 조형물이 바다를 향해 뻗어 있었고, 그 아래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조형물을 가리켰다. “12년 전 설날, 저 꼭대기까지 몰래 올라간 적이 있어. 지금 생각하면 위험한 일이었는데, 그때는 불꽃놀이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거든.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불었는데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던 게 아직도 생생해.”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때 네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상상돼. 무모하지만 즐거웠을 것 같아.” 그녀의 한마디에, 오래된 기억 속 나의 충동적인 순간이 갑자기 지금 여기에서 빛을 얻은 것처럼 느껴졌다.


며칠 뒤, 우리는 타이동의 골목길을 함께 걸었다. 상점들의 불빛이 번쩍이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겹겹이 쌓이는 번잡한 거리 속에서 나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오래 묻어두었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에 여자친구랑, 그리고 그녀의 새로운 남자친구랑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어. 준비되지 않은 순간이었지.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고, 그냥 얼어붙은 채 서 있을 수밖에 없었어.” 리란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 손길 하나가 말보다 큰 위로였다. 마치 오래 전의 부끄럽고 아픈 기억이 그녀의 온기를 통해 조금은 덜 무겁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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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날, 우리는 잔교 끝까지 걸어갔다. 바람은 거칠었고, 파도는 다리를 때리며 흰 물결을 부서뜨렸다. 바다 냄새와 습기가 온몸에 스며들었다. 나는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여기에 서면 늘 허무했어. 예쁘지만, 끝에 도착하면 아무것도 없잖아. 그냥 바다뿐이야. 그 허무함이 내 마음 같을 때가 많았지.”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근데 오늘은 달라. 이제 혼자가 아니라, 네가 옆에 있으니까.” 그러자 그녀는 잔잔히 웃으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끝이라고만 생각했던 장소가 새로운 시작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내어 조금씩 다른 장소들을 걸었다. 내가 묵혀두었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놓으면, 그녀는 조용히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때는 짧은 웃음으로, 어떤 때는 손을 잡아주는 제스처로 반응했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침묵이 나를 더 편안하게 했다. 과거에 갇힌 나의 기억이 이제는 그녀의 눈빛과 손길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바뀌어 갔다. 혼자만의 무게로 남아 있던 시간이 둘의 추억으로 다시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의 발걸음은 단순히 만남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길을 나누어 걷는 여정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여정은 아마도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멀리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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