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나는 갑자기 소왕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혹시 친구 집에서 자면 안 될까?”
내 목소리는 최대한 무심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전화기 너머로 소왕이 웃으며 말했다.
“왜? 혹시 여자친구 오는 거 아니야?”
나는 순간 대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짧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냥… 오늘은 좀 혼자 있고 싶어서.”
“알았어, 알았어. 눈치챘으니까 됐지. 잘 놀아.”
전화를 끊고 나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집이라는 공간에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게 단순한 일이 아님을 다시금 느끼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퇴근 후 학교 근처에서 리란과 함께 마트에 들어섰을 때, 그녀의 눈은 기대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딸은 할머니 댁에 부탁했어, 아 이 해방감 ㅎㅎ 그런데 오늘 메뉴는 뭐야?”
“부대찌개. 한국에서 먹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다고 했잖아.”
“정말? 최고야!”
우리는 햄과 소시지를 고르며 장난을 주고받았다.
그녀가 집어 든 소시지를 흔들며
“내가 고른 건 특별히 맛있을 거야”라고 말할 때,
나는 “하하하, 왜 하필이면 소시지야??” 괜히 그 말이 음식이 아닌 우리 둘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한마디 했다.
“부대찌개의 별미는 바로 이 ‘베이크드 빈’에 있어, 이게 없으면 부대찌개가 아니지”
리란의 눈은 아주 존경하는 눈빛으로 가득했다. 이외의 재료와 간단한 음료들도 같이 샀다.
집에 들어서자 그녀는 거실을 천천히 둘러봤다. 책상 위의 교재와 작은 달력을 보더니 미소 지었다.
“진짜 선생님답다. 깔끔하고, 뭔가 교실 같은 느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리는 소왕이 잘하지. 오늘은 안 들어와.”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살짝 변했다. 더 가까워진 듯,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의식되는 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부엌에서 국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를 때, 리란은 거실에 앉아 나를 지켜보다가 말했다.
“되게 진지하다. 마치 요리 시험 보는 것 같아.”
“중요한 손님이니까.”
“손님 아닌 것 같다고 했잖아.”
그녀의 말은 장난처럼 들렸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오래 울렸다.
식탁에 앉아 함께 국물을 떠먹으며 그녀는 감탄했다.
“와… 이 맛이구나. 드라마보다 훨씬 맛있어.”
“같이 먹으니까 더 그렇지.”
“맞아. 혼자라면 절대 이런 기분은 못 느꼈을 거야.”
식사가 끝나갈 즈음, 우리는 가족 이야기와 학생 시절의 추억을 나눴다. 대화가 점점 깊어질수록 시선이 자주 머물렀고, 웃음 뒤에 잠시 이어지는 침묵마저도 편안했다.
설거지를 하려던 순간, 리란이 다가와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
“괜찮아. 오늘은 손님이잖아.”
“손님 아닌 것 같다고 했잖아.”
그녀의 말에 나는 국자를 내려놓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이미 대답은 서로의 눈빛에 담겨 있었다.
식사 후 몸과 방 안 가득 남아있는 부대찌개 냄새를 환기시키기 위해 30분 정도 창을 열었다. 뭔가 어색함이 잠깐이었지만
바깥의 바람으로 흩어지는 기분도 들었다.
어느 정도 환기가 된 후 서로 아무 말은 없었지만 차례로 샤워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나야 물론
항상 하는 샤워였지만 리란은 처음 집에 와서 샴푸가 어디 있는지 바디 클렌저는 어디 있는지 물어봤다.
나는 침대에 먼저 누워있었고 리란은 이어서 방으로 들어오며 가리고 있던 타월을 발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러자 불은 끈 상태의 방이었으나 그녀의 콜라병 같은 매끈한 몸매가 라인을 타고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우리는 포옹을 했고 그동안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대화를 몸으로 뜨겁게 나누기 시작했다. 사실 오랫동안 교류가 없던 서로여서 생각보다 긴 시간 동안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로 사랑을 나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녀의 옆에서 잠들기 전, 나는 생각했다.
오늘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시작? 아니면 그저 따뜻한 저녁?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문이 닫힌 방 안에서 마음이 열렸다는 사실, 그리고 그 온기가 오래 남을 거라는 확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