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터 위 진열장에 놓인 케이크는 하나같이 반듯했고, 바깥 유리창에는 봄비가 얇게 번지고 있었다. 리란과 마주 앉은 작은 테이블에 종이 메뉴판 두 장, 물 잔 두 개, 그리고 커피 두 잔이 놓였다. 잔 표면에 떠오른 미세한 기름막이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요즘 수업은 어때?”
그녀가 먼저 물었다.
“아이들이 전보다 질문을 많이 해. 대학 얘기, 진로 얘기… 그러다 보면 나도 덩달아 생각이 많아지고..”
리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늘 진지해요. 나는 그런 게 좋아.”
그 말이 어쩐지 따뜻하게 가슴 안쪽에 내려앉았다. 우리는 오래 서성였던 이야기들을 조금씩 풀었다. 학생들이 발표하던 날의 소란한 교실, 내가 쓸데없이 길게 설명하다가 스스로 쑥스러웠던 순간, 그리고 수업 뒤에 한 학생이 털어놓았던 진짜 고민들. 그녀는 들을수록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였고, 나는 그 작은 움직임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계산을 마치고 문을 나서는데, 뜻밖에도 빗줄기가 더 굵어져 있었다. 그녀가 가볍게 우산을 펼치며 내 쪽으로 조금 더 다가섰다. 우산 가장자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그때였다.
이상하리만큼 친밀한 느낌.
대단한 말이나 약속은 없었는데, 같은 방향으로 두어 걸음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묘하게 가벼워졌다. 골목 끝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여기서 헤어져요. 조심해서 들어가.”
“응, 리란도.”
그녀가 돌아서자 우산 천 아래에서 작은 소리로 비가 속삭였다. 나는 잠깐 그 자리에 서서, 방금 전 대화가 남긴 온도를 확인하듯 손등을 쓸어내렸다. 오늘의 나에게 어울리는 문장이 하나 떠올랐다. 지나치게 빠르지 않게, 그렇다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웨이신을 열었다. 바로 “좋아한다”는 말을 쓰진 않았다. 나이도 있고, 조심해야 할 마음도 있었다. 대신 오래 생각한 문장들을 천천히 이어 붙였다.
[나] 오늘 고마웠어. 요즘은 마음이 자주 크게 흔들리진 않거든.
그런데 너랑 있으면, 속도가 조금 달라져.
서두르고 싶지 않아. 다만… 우리가 서로를 조금 더 깊게 알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서툴면 말해줘. 천천히 배울게.
보내기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한동안 멈춰 섰다. 지우고, 고치고, 다시 쓰고. ‘깊게’라는 단어를 ‘조금 더 오래’로 바꿨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보내기. 녹색 말풍선이 화면 오른쪽으로 미끄러졌다.
그날 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알람보다 먼저 눈이 떠졌다. 첫 번째로 확인한 건 날씨도, 수업 일정도 아닌 웨이신이었다. 웨이신은 읽음 표시가 없어서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말풍선은 잠잠했다. 양치질을 하다가도 진동이 울린 것 같아 화장실 문턱에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착각이었다.
교실에 들어가 출석을 부르고, 동사 활용을 칠판에 적었다. “-아/어지다” 변화 규칙을 말하면서도 시선은 자꾸만 책상 위 휴대폰으로 돌아갔다. 학생 하나가 손을 들었다.
“선생님, 이건 왜 ‘예뻐지다’가 돼요?”
“음… ‘예쁘다’에서 어간 ‘예쁘-’에 ‘-어지다’가 붙어서….”
설명은 자동으로 입 밖으로 나왔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다른 문장이 굴러다녔다. 예뻐지다. 깊어지다. 조심스러워지다. 전자 칠판용 펜을 쥔 손이 떨렸다. 수업이 끝나고 교탁에 앉으니 진짜 진동이 울렸다.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리란] 메시지 잘 읽었어요. 고마워.
나도… 좋은 사람이랑은 천천히, 신중하게 지내고 싶어.
근데 지금은 조금 복잡해서, 바로 대답하기는 어려워요. 이해해 줄 수 있죠?
화면을 오래 내려다봤다. 복잡하다. 나이, 일, 집, 책임. 그녀의 단어에 포함된 짐작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곧바로 길게 답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내 조급함만 드러날 것 같았다. 몇 분 뒤, 짧게 썼다.
[나] 그럼, 기다릴게.
우리에게 맞는 속도로.
점심시간, 교무실 창가에 서서 커피를 홀짝였다. 따뜻한 종이컵이 손바닥을 적당히 데웠다. 학생들의 웃음 소리가 복도 끝에서 흘러왔다. 웃음이 파도처럼 번져오다가, 창문 프레임에 부딪혀 사라졌다.
저녁엔 자료를 만들다 말고, 문장 하나를 더 보냈다. 삭제하고, 다시 쓰고, 또 지웠다. 결국 보내지 않았다. 그날 밤은 뒤척였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회색의 대답이 방 안 공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불을 끄면 휴대폰 화면이 더 선명했다.
잠들기 직전, 알림 하나. 심장이 튀었다. 배달앱 쿠폰이었다. 허탈하게 웃으며 화면을 엎어 놓았다.
이틀째 되는 날, 아침 공기가 조금 바뀌었다. 중앙난방의 송풍 소리가 낮게 깔렸고, 하늘이 옅은 파랑을 되찾았다. 학교로 가는 길,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렸다. 신호등 사람 그림이 깜빡였다. “뚜—뚜—뚜.” 내 발은 멈춰 있었지만 마음은 자꾸 건너가려 했다.
수업 중, 아이들이 자기소개 응용 과제를 발표했다. “봄이 되면 ______ 하고 싶어요.”
“저는 사랑하고 싶어요.” 누군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모르게 “천천히요.” 하고 중얼거렸다. 아이가 되물었다. “선생님, 뭐라고요?”
“아니, 발음. ‘천—천—히.’”
학생들이 웃었다. 웃음이 교실 천장에 부딪혀 조용히 내려앉았다. 천천히. 오늘 내가 가장 많이 떠올린 단어였다.
점심 무렵, 복도 끝 사무실에 들렀다. 프린터가 종이를 뱉어내는 동안 휴대폰을 한 번 더 켰다. 변함없었다. 그 사이에 프린터는 인쇄를 멈추고 붉은 버튼을 깜빡였다. 용지가 걸렸다는 신호. 서랍을 열어 커버를 올리고 눌어붙은 종이를 조심히 빼냈다. 멈춤—정리—다시 맞물림. 기계가 상황을 넘어가는 순서를 몸으로 보여줬다. 내가 해야 할 일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그날 밤은 비교적 잘 잤다. 피곤이 이겼다.
셋째 날, 눈을 뜨자 햇빛이 커튼 틈으로 날카롭게 들어왔다. 알람보다 먼저, 웨이신 알림이 화면에 떠 있었다. 손끝이 먼저 떨렸다.
[리란] 생각해 봤어요.
우리의 속도는… 아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였으면 좋겠어요.
이번 주말에 조심스럽게 한 번 만나볼까요?
너무 거창하게 말고, 그냥 산책부터.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었다. 방 안 공기가 새로 들어오는 느낌. 세수를 하면서도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다. 거울 속 표정을 억지로 펴지려 했지만 잘 안 됐다. 칫솔 거품이 코끝에 닿을 만큼 웃음이 올라왔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오전 수업 내내 칠판에 쓰는 글씨가 부드러웠다. 아이들이 알아챘는지 “선생님 오늘 기분 좋아 보여요.” 했다. “맞아. 봄이라서.”라고 얼버무렸다. 봄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똑같이 흘러가던 시간에, 작은 물길이 하나 만들어진 느낌이었다.
퇴근길, 샤오위산이 보이는 쪽으로 일부러 돌아 걸었다. 바람이 아직 차서 코끝이 시큰했지만, 좋았다. 계단 난간에 걸터앉아 한참을 아래를 내려다봤다. 도시의 불빛들이 켜지고, 바다가 길게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웨이신이 다시 진동했다.
[리란] 토요일 오후 3시, 바다 보이는 카페 어때요? 사람 적은 곳 알아요.
우리, 그냥 이야기만 해요.
[나] 좋아. 이야기만.
대신, 오래.
보내고 나니, 비어 있던 자리에 따뜻한 기운이 올라왔다. 오래. 오래 걷고, 오래 듣고, 오래 생각하는 시간. 나에게는 낯설지 않은 방식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맞는 속도일지도 모른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예전엔 이런 설렘이 오히려 불안으로 치우치곤 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스스로에게 작은 약속을 했다. 확신보다 성실을, 결과보다 과정을, 빠름보다 오래.
창밖에서 바람이 한번 크게 스쳤다. 샤오위산 쪽에서 시작된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고, 다시 멀어졌다.
잠들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줄을 더 남겼다.
[나] 리란, 고마워.
우리 얘기, 천천히 길게 써보자.
휴대폰 화면을 엎어놓고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심장이 또박또박 제 시간을 걸었다. 머릿속에서 토요일 오후의 장면이 조용히 재생됐다. 바다 보이는 창가 자리, 두 잔의 커피,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번 시작하는 사람들.
나는 알았다. 이것이 대단한 선언은 아니라는 걸. 다만, 내 삶의 문장 끝에 작은 쉼표 하나가 찍힌 것뿐이라는 걸. 그러나 때로는 쉼표 하나가 문장을 완전히 바꿔놓기도 한다.
숨을 천천히 고르고, 눈을 감았다. 내일은 학생들에게 또 어떤 이야기를 들어줄까. 그리고 토요일에는 어떤 이야기를 건네볼까. 생각은 점점 가벼워져서, 마침내 잠으로 스며들었다.
오래. 조심스럽게. 그리고 서로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