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과 함께한 날들은 늘 교과서와 단어장 속에서만 흘러가지 않았다. 어떤 때는 그들의 인생 고민을 듣고, 또 어떤 때는 그저 가벼운 웃음을 나누는 것이 나의 역할이기도 했다. 가르침은 단순히 문법과 발음을 교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을 여러 번 깨닫곤 했다.
GD의 팬, 한 학생의 간절한 편지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한 여학생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BIGBANG의 GD의 열렬한 팬이었다. 수업 시간에 가끔 그의 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GD에 대한 애정이 깊었고, 언젠가 한국에 가면 꼭 직접 편지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처음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 그녀가 직접 만날 수 있으리라곤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만은 장난이 아니었다. 며칠 뒤, 그녀는 두툼한 종이뭉치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선생님, 이거 좀 봐주세요. 제가 GD 오빠 생일에 드리고 싶은 편지예요.”
그 편지는 놀라울 만큼 정성스러웠다. 그녀가 얼마나 GD를 좋아하는지, 그의 음악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항상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단순한 팬심을 넘어선, 누군가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그 편지를 한국어로 번역해 주면서, 학생이 모르는 표현이나 문법을 하나씩 짚어주었다. 단어 하나에도 신중함이 묻어났고, 그녀는 내 설명을 꼼꼼히 받아 적었다. 그 순간, 나는 언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그녀의 꿈을 돕는 조력자가 되어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학생은 실제로 한국에서 GD에게 그 편지를 전할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 GD가 그것을 읽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지만, 학생의 목소리엔 잊을 수 없는 기쁨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때, 누군가의 작은 열망을 함께 밀어주는 일이 이렇게 소중할 수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또 다른 학생, 사랑과 현실의 고민
다른 학생의 고민은 성격이 전혀 달랐다. 그는 수업이 끝난 뒤 조용히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선생님, 사실 저 한국 남자친구가 있어요. 그런데… 국제 결혼 같은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녀는 아직 대학생이었고, 나이에 비해 결혼을 고민하기엔 너무 이른 듯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심스레 말했다.
“가볍게 만나는 건 괜찮아. 하지만 결혼은 달라. 문화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짧게만 보고 결정하기엔 너무 큰 일이야. 시간을 두고 충분히 고민해 보는 게 좋을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단호한 표정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이미 임신을 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았다.
몇 년 뒤, 그녀의 SNS를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고모”라는 계정으로 올라온 글에는 행복한 가족 사진이 가득했다.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늘 국제 결혼이 힘들고 고단하다는 이야기만 들어왔는데, 이렇게 밝고 단단한 결실을 맺는 경우도 있구나 싶었다. 내가 했던 조언이 전부 옳았던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자신의 길을 스스로 잘 선택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교사의 자리를 넘어선다는 것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나는 깨달았다. 교사라는 자리는 단순히 교실 앞에서 한국어를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때로는 누군가의 꿈을 응원하는 동반자가 되고, 때로는 누군가의 인생을 지켜보는 조용한 증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이 내게도 힘이 되었다. 현실의 무게, 낮은 월급, 흔들리는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남아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리란을 향한 발걸음
며칠 뒤, 리란에게서 또 연락이 왔다.
“이 선생님, 오늘은 시간이 어때요? 같이 밥 먹을까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학생들을 통해 배운 것은 ‘사람의 삶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 삶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리란과의 만남은 여전히 나를 위축시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묘한 기대와 설렘을 주고 있었다. 나는 알았다. 이제는 단순히 교사로서 학생들을 돕는 자리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삶에서도 한 걸음을 내딛을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