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지 않는 우리

by leolee

카운터 위에 분홍색 케이크 조각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스팀 소리가 얇게 비명을 질렀다 멎는다. 유리창 너머 샤오위산 능선이 겨울 끝의 빛을 조금씩 되찾는 오후였다. 우리는 늘 앉는 창가 자리로 갔다. 의자를 당기며 리란이 웃는다.


“오늘은 아이들 어땠어?”


“말 많았지. 봄 되면 뭐 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연애하겠다는 애가 꼭 한 명은 있어.”


“그런 말은 어른들만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어른들이 더 못해. 말만 많고.”


리란이 킥 하고 웃었다. 메뉴는 더 볼 것도 없이 정해졌다. 아메리카노 두 잔, 그리고 그날의 케이크 하나를 반으로 나눠 먹는 일. 누가 먼저 시키자고 하지 않아도, 어느새 일상은 두 사람 사이에 작은 루틴으로 자리를 잡았다.


커피가 놓이고, 우리는 반말을 탔다. 처음엔 ‘괜찮아요?’ ‘고마워요’ 같은 존댓말을 썼지만, 메시지에서 “천천히 보자”는 말을 주고받은 뒤로, 말끝이 자연스럽게 내려앉았다. 고백은 없었고 선언도 없었지만, 서로의 말투가 이미 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너 요즘 잠은 좀 자?”


“음… 예전보단. 너는?”


“난 잘 자. 이상하게 네가 보낸 메시지 읽으면 바로 졸려져.”


“그건 지루해서 그런 거 아니고?”


“그런 식으로 말 돌릴 거면, 케이크 다 네가 먹어.”


우리는 빙글빙글 떠밀고 받아치고, 그러다 잠깐씩 말없이 창밖을 보았다. 반 말과 반 침묵 사이, 이상하게 가까운 온도. 테이블 끝에서 내 손가락이 컵을 감싸 쥐면, 그녀도 맞은편에서 똑같이 손을 둥글게 말아쥐었다. 그 사소한 동작이, 같은 페이지에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커피를 거의 다 마실 즈음, 리란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 서두르지 말자. 대신 뭘 하든 오래 하자.”


“응. 오래 걷고, 오래 얘기하고, 오래 웃고.”


“그리고 오래 먹고.”


“그건 자신 있다.”


우리는 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우산 없이도 괜찮을 만큼의 산뜻한 바람. 골목 끝까지 나란히 걸었고, 모퉁이를 돌기 전 짧게 눈을 맞췄다.


“문자 할게.”


“응. 너무 늦지 않게.”


나는 그녀가 가는 방향을 한참 바라보다가, 반대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누군가 조용히 따라오는 것처럼 마음 한쪽이 따뜻했다.


다음 날 아침, 알람보다 먼저 눈이 떠졌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무 메시지도 없었다. 이상하게 실망감은 없었다. 대신 어제의 웃음이 방 안 공기처럼 남아 있었다. 세수를 하고, 수업 준비를 하며 칠판에 첫 문장을 적었다.


봄이 되면, ______ 하고 싶다.


아이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한 명이 “선생님은요?” 하고 물었다. 나는 분필을 잠깐 멈추었다가, 칠판 귀퉁이에 작게 썼다.


오래 걷고, 오래 듣고, 오래 웃는다.


학생들이 웅성웅성했다. “누구랑요?” “선생님 봄바람났다!” 나는 일부러 어깨를 으쓱했다.


“한국어는 문장 끝이 중요해. ‘누구랑’보다 ‘오래’가 포인 트지.”


웃음이 교실 천장에 부딪혀 조용히 내려앉았다. 쉬는 시간, 창가에 기대 서 있는데 웨이신이 진동했다.


[리란] 오늘 바람 적당하네. 저녁에 걷자.


[나] 좋아. 어디로?


[리란] 바다 쪽. 조용한 길 알아.


짧고 명확했다. 나는 그 간결함이 좋았다. 대답을 길게 늘이지 않아도 서로 같은 곳을 보고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저녁, 바다가 보이는 길로 나갔다. 파도는 잔잔했고, 항구 쪽 등대가 해가 기울자 천천히 불을 켰다. 리란은 머리를 간단히 묶고 어두운 패딩에 손을 넣었다. 나는 장갑을 빼 그녀에게 건넸다.


“나 두 개 있어. 한쪽만 껴.”


“너는?”


“난 주머니 있잖아.”


장갑 하나가 그녀의 왼손에 들어가고, 빈 오른손이 내 코트 소매를 아주 살짝 잡았다 놓았다. 그 아주 짧은 동작이 바람의 방향을 틀었다. 우리는 별말 없이 30분쯤 걸었다. 바람 소리, 파도 소리, 신발 밑창이 보도블록에 긁히는 마찰음만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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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원래 이렇게 말수가 적었어?” 내가 물었다.


“아니. 근데 너랑 있으면 말이 줄어. 편해서.”


“불편해서가 아니라?”


“그럼 케이크 다 네가—”


“알았어, 알았어.”


우리는 다시 웃었다. 웃음은 파도보다 오래 남아 천천히 흩어졌다.


그 주, 우리는 두 번 더 만났다. 한 번은 학교 근처 된장찌개집에서, 한 번은 역 앞 카페에서. 특별한 이벤트는 없었다. 대신 식탁 위에서 서로의 삶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그녀의 일, 가족, 책임, 내가 가진 망설임, 교실의 하루, 학생들의 말버릇, 그리고 각자의 오래된 습관들. 어느 순간 나는 내가 모르는 나를 그녀를 통해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는 걸 어려워하는 편이야. 오랫동안 그래왔고.”


“나도. 기대면 무너질까 봐, 기대지 않는 쪽을 택했어.”


“그래서 우리, 기댄다기보다 나란히 가자.”


“그러자. 나란히.”


계산대 앞에서 그녀가 카드를 내밀자, 이번엔 자연스럽게 내 카드로 바꿔 들이밀었다.


“오늘은 내가. 다음엔 네가. 그다음엔 또 내가.”


“경쟁이네?”


“아니, 번갈아. 오래가자며.”


경제적 차이가 스멀스멀 마음을 건드리는 날들도 있었지만, 그렇게 번갈아 내는 일은 우리에게 좋은 리듬이 되었다. 자존심이 아니라 호흡을 맞추는 일. 나는 그 차이를 분명히 느꼈다.



밤이면 나는 웨이신 창을 열었다 닫았다. 고백 같은 말은 여전히 쓰지 않았다. 대신 이런 문장들을 보냈다.


[나] 오늘 수업에서 아이들이 ‘오래’라는 말을 따라 했어. 네가 생각났지.


[나] 바람이 좀 강했어. 너 장갑 두 개 다 챙겨.


[나] 다음엔 네가 말한 그 조용한 카페로 가자.


그리고 그녀의 답은 늘 비슷한 온도였다.


[리란] 오래. 기억할게.


[리란] 장갑은 네가 빌려줄 거잖아.


[리란] 내일 7시, 창가 자리 예약했어.


이 간결한 왕복 속에서, 우리의 거리는 숫자로 줄어들지 않았지만 체온으로 가까워졌다. 잠든 뒤 새벽에 깨면, 한 번쯤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려 본다. 거기에 잡히는 게 없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내 손이 빈 손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다.


일은 계속됐다. 아이들의 발표와 시험, 문법과 발음, 장난과 꾸중. 그리고 교무실 창가, 종이컵 커피, 붉은 스티커가 붙었다 떨어진 학교 공지, 출입구의 체온계, 중앙난방의 낮은 숨소리. 그 모든 반복 속에서 하나가 달라졌다. 나는 더 자주 웃었고, 더 자주 기다렸다. 기다림이 괴롭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도 같이 걷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요즘 표정 좋아요.”

리나가 말했다.

“그래?”

“누군가한테 오래 웃는 중이죠?”


“발음 연습이나 해.”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가 장난스럽게 눈을 굴렸다.


토요일, 우리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다시 만났다. 창가에 앉으니 잔잔한 물결 위로 빛이 길게 흘렀다. 머그컵의 가장자리에 맺힌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나는 아주 오래 고민해 온 말을 꺼냈다.


“우리, 이름을 붙이지는 말자. 대신… 규칙을 만들자.”


“규칙?”


“서두르지 않기. 숨기지 않기. 서로의 일상을 침범하지 않기. 그리고—오래 보기.”


리란이 잠깐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하나 더.”


“뭔데?”


“힘들면 솔직히 말하기. ‘괜찮아’ 대신 ‘괜찮지 않아’라고.”


“그건 어렵다.”


“그래서 규칙이 필요하지.”


우리는 규칙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접어가며 외웠다. 규칙이 관계를 대신해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같은 방향으로 걷게 해 줄 거라고 믿었다.


카페를 나오자 바람이 더 따뜻해져 있었다. 신발끈이 풀려 쪼그려 앉아 묶는데, 그녀가 내 어깨를 가볍게 톡 쳤다.


“나 먼저 내려갈게. 천천히 와.”


그녀가 몇 걸음 앞서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보며 손을 들었다. 멀리서 보는 손짓이 어쩐지 오래된 약속처럼 보였다. 나는 그 손짓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밤, 집으로 돌아와 불을 끄기 전에 웨이신을 켰다. 고백이 아닌, 그러나 충분히 마음의 모양을 닮은 문장 하나를 보냈다.


[나] 오늘 좋았다. 내일도 좋았으면 좋겠다. 모레도. 글피도.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나는 알고 있어.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잠시 뒤, 화면에 말풍선 하나가 조용히 떴다.


[리란] 오래. 그러니까 천천히.

다음 주엔 내가 살게. 번갈아, 오래.


나는 휴대폰을 엎어 놓고 누웠다. 창밖의 바람 소리가 여전히 일정했다. 눈을 감으면, 커피숍의 조도와 바닷길의 짧은 장갑, 저녁 골목의 미세한 튀김 냄새, 계산대 앞 카드 두 장의 번갈음이 한 장면으로 겹쳐졌다. 고백이 없는 연애, 선언이 없는 합의, 이름이 없는 이름.


그런데도 분명했다.


우리는 이제, 서두르지 않는 사람들. 오래 가기 위해, 천천히 켜켜이 알아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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