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에서 토목과를 전공하고 있을 때였다. 나이는 스물한 살, 만두를 팔면서 적성에 맞지 않은 공부하던 어려운 시기였다. 브라질에서 사업하는 외삼촌이 미국에 가자는 제의를 해왔다. 삼촌이 미국에 옷 가게가 있는데 비행기 표와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해 줄 터이니 미국으로 가자는 것이다. 나는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귀가 솔깃했다. 그 당시 어머니는 누나와 함께 한국에 가 있었고, 나는 형하고 살고 있었다. 형은 미국 가는 일을 적극 반대했다. 없는 형편이지만, 이제 우리 형제 둘밖에 남지 않았는데 같이 힘을 합쳐 살아야 한다고 했다.
외삼촌은 정이 많은 사람이지만, ‘뻥 삼촌’이라고 불릴 정도로 뜬구름을 잡기에 잘못 따라갔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적극적으로 말렸다. 하지만 그 당시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었고, 어머니는 한국에 있는 터라 나는 고삐 풀린 말처럼 미국 구경을 하고 싶어 멋도 모르고 삼촌을 따라 나셨다. 재정 상황이 안 좋은 나에게 미국대사관은 연장이 불가능한 1개월 단수 비자를 주었다. 브라질과 비교해 볼 때 미국은 정말 멋진 나라였다. 모든 것이 현대적이고 좋아 보였다.
삼촌의 옷 가게는 유태인과 흑인들이 인접한 곳인 뉴욕 주 브롱스라는 곳에 자리한 조그만 가게였다. 가게 인수를 한 지가 얼마 안 되어서 어수선했다. 나 말고 걸인생활을 하던 정신질환이 있으신 어떤 아저씨도 삼촌 집에 거주하면서 가게 일을 돕고 있었다. 나와 아저씨, 삼촌은 한 아파트에 살면서 주중에는 가게에 있는 옷 정리와 판매를 하고, 주말에는 봉고차에 옷을 한가득 실어 노천시장에 자리를 깔고 라틴계 미국인에게 판매했다.
처음에는 삼촌을 돕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일했으나 날이 갈수록 산더미처럼 일이 쏟아져 하루 종일 가계 지하실에서 햇볕도 보지 못하고 먼지를 먹으면서 옷 재고 정리를 하느라 나에게는 자유시간이 없었다. 한 달쯤 지나자 내 신세가 차량 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브라질 생활이 그리워졌다. 브라질에서는 전공에 적성에 맞지 않고 언어장벽이 있어서 게을리했던 공부가 다시 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루는 시간을 내어 퀸즈 컬리지(Queens college)라는 전문대학을 방문하고 왔는데, 다시 학교를 다니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왜 가족이 있는 브라질을 놔두고 이곳에서 공부도 못하고 창고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나 생각이 들어 미래가 암 담해 보였다. 한 달이 지나면 비자가 만료되는데 삼촌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불법 체류자로 지내면 언젠가는 나라에서 사면해 줄 거라며 근거 없는 희망을 주었다. 내가 불법 체류자가 되고 학생 신분을 잃으면 한국에서 나를 보증 서 준 사촌 형이 형벌을 받는다는 점이 있었는데도 삼촌은 무조건 머무르라고 했다. 나는 마음이 약해서 삼촌이 하라는 것은 항상 해왔다. 그런데 삼촌의 속셈이 무언가를 알아 버렸고, 왜 형이 삼촌을 따라가지 말라는 이유도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나를 보증 서 준 사촌 형 생각이 나서 거의 도망치다시피 삼촌을 뿌리치고 브라질 가는 비행기를 탔다.
그때 당시 내가 크게 느낀 점이 있었다. 나는 무슨 어려움이 있어도 하고 싶은 공부를 찾아내서 끝까지 할 것이라고 결심했다. 그런 어려움과 고난이 있었기에 돌아와서 이를 악물고 학업에 몰입할 수 있었다. 다시 돌아와서는 한눈팔지 않고 공부에 집중했다. 다시 입시학원에 들어가서 입시공부를 열심히 하여 무역학을 공부한 뒤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성공한 CEO가 되고 싶었다. 낮에는 만두를 팔고 저녁에는 만두 판 돈으로 학비를 조달하며 학교를 다녔지만, 언젠가는 이 시장바닥에서 벗어나 고픈 꿈이 있었다.
그래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가겠다는 결심을 했다. 전부 미국에서 경험했던 희망 없는 생활 덕분이었다. 희망 없는 생활을 살아 봄으로써 비로소 좀 더 나은 희망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희망 없는 절망, 그것은 꼭 몇 번은 겪어야 하는 것 같다. 삶의 활력소가 되고 더욱 튼튼한 나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