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세계연맹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당한 후 대한체육회의 배려로 9월 베이징에서 열리는 국제 스포츠회의에 참석하게 되는 기회를 얻었다. 세계 생활체육 협의회(World conference of Sport for all)라는 국제 생활체육협의회 세계총회가 있었는데 세계 각국의 스포츠 관계자들이 스포츠의 발전과 저변화란 목적으로 만나는 의미 있는 대회였다. 한국에서는 대한체육회회장, 본부장, 과장, 대학교수와 레슬링 연맹 인재 한 명이 참가했다.
짐을 풀고 저녁식사가 있는 첫 번째 행사인 인터콘티넨탈에 위치한 웰컴 리셉션에 참가하였다. 내 인생에 여러 종류의 파티에 참석해 보았지만 이렇게 화려하고 멋진 파티는 처음인 것 같았다. 좋은 음식에 술 그리고 멋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지금까지는 분위기 좋고 젊은이들이 모인 곳이 최고 좋은 파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나의 생각을 뒤집어 놓았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인데 그들의 눈에서는 광채가 났고 옷 입은 맵시도 패션모델 이상의 센스가 있었다. 돈과 재능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참으로 멋져 보였다. 지식과 경험이 많은 세계의 정치계, 경제계 각료 인사들의 모임이었다. 그중에는 IOC회장 자크로게, 안토니오 사마란치아들인 안토니오 사마란치 주니어, 북한 장웅의원, 페루의 리마 시장, 덴마크 왕자, 각국 장관 등 엘리트들이 있었다. 스포츠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 중 하나는 마리솔 까사도(MARISOL CASADO) 세계트라이애슬론 연맹회장이자 IOC 위원이었다. 그녀는 스페인 출신의 IOC 멤버였고, 나를 캐나다 세계연맹에서 거절한 이사의 최고 보스였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를 찾아가 나를 소개했다. 스페인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녀가 현재 아프리카에 철인대회를 개최하고 싶은 관심이 나와 같아서 내가 아프리카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아프리카에 특별한 열정이 있고, 봉사에 관심이 많았기에 서로 연락하기로 했다.
MARISOL은 춤추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맥주도 마시고 같이 춤추러 가기로 하면서 서로 친해졌다. 참 아이러니했다. 세계연맹에서 대한연맹이 선발해 놓은 내가 나이가 많다고 인턴을 거절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세계연맹회장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녀는 IOC 위원이자 세계연맹 회장이 이지만 겸손하고 사교적인 인물이었다.
5일간의 공식일정을 마치고 나는 이틀 더 휴가를 내서 중국을 돌아보고 싶었다. 짐을 챙겨서 행사가 있었던 컨벤션 센터를 지나가다가 도시락을 먹고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도시락을 10위안에 하나 사고 물을 사려고 했는데, 물이 3위안이라고 한다.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어 바가지 씌우는 것이 아닌가 싶어 사지 않겠다고 하고 그냥 나왔다.
그런데 물 파는 소년이 내 뒤를 따라 나왔다. 그러고는 물값을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그냥 가져가란다. 나는 거절했지만 소년은 물을 나한테 건네주고 그냥 확 뒤돌아가 버렸다. 참 묘한 기분이었다. 형편이 어려울 텐데 왜 물을 공짜로 주려고 했을까. 내가 비싸서 안 산 거라고 생각해서 그럴까. 아니면 내가 한국 사람이라 관심이 있어서 그냥 주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내가 바가지 씌운 것 같은 표정을 해서 그것을 부정하는 의미에서 일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엉겁결에 주는 물을 받아 들긴 했지만, 물을 팔아서 생계를 잇는 소년의 물을 돈 주지 않고 마시는 기분이 참 묘했다. 곰곰이 생각하다 못해 도시락을 먹은 후 다시 그 소년이 있는 곳으로 돈을 주기 위해 돌아갔으나 소년은 그 자리에 없었다. 컨벤션 센터 앞이라 단속이 나와 잠시 피한 것 같았다. 찾고 또 찾았다. 하지만 소년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 소년이 물을 팔던 곳은 내가 5일 동안 럭셔리(Luxury)하게 지낸 컨벤션 센터 앞이었다. 어제만 해도 나는 컨벤션 센터 안에 있었고 오늘은 컨벤션 센터의 문 하나 사이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정이 많은 소년을 만났다.
35년 전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뜨거웠다. 우리 가족이 브라질로 이민 간 초창기에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생계유지를 위해 나는 어머니가 만드신 만두를 아이스박스를 매고 “만두 사세요, 만두 사세요” 하면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팔아서 공부를 했다. 오늘 본 바로 그 소년처럼…. 그 당시 나는 그 소년과 아무 다를 바가 없었다. 천 원짜리 만두를 하루에 50-60개 파는 그런 생활을 3년 동안 했으니 말이다. 아무 희망이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만두 팔이 소년이었다. 그럼에도 시장바닥을 벗어나기 위해 공부해서 박사학위도 받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비즈니스를 한다. 나는 물 팔이 소년같이 아이스박스를 메고 생계를 위해 살았지만, 오늘은 새로운 인생을 찾기 위해 국제스포츠회의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물 파는 소년 덕분에 과거와 미래를 돌아보게 되고 삶에 희망, 꿈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에게 꿈이 없었으면 지금 내 자리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현재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이제 나의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고민 중이다. 비즈니스를 잘해서 큰 부자가 될까?, 교수의 길의 걸을까? 내 박사학위의 논문제목처럼 스포츠 외교관이 되어 내 능력을 새로운 세계에서 펼쳐 볼까? 사회에 봉사하며 살아갈까? 아니면 은퇴 후 편안하게 내가 좋아하는 운동이나 하면서 살까? 하나님은 물장사 소년 같은 나의 삶을 시장바닥에서 끌어내 주셨으니 나에게 맡길 일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모세가 광야를 누비며 은둔생활을 40년 동안 한 후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셨다. 나도 그때를 기다리려 한다. 그리고 그동안 많은 사람이 날 도와주었으니 나도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며 살아야겠다.
나는 기도를 잘할 줄 모르지만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이렇게 하곤 했다. “하나님 지금 제가 참 어려운 형편에 있습니다. 제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저도 하나님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거지소년에서 미 상원 의원이 된 신호범 씨의 간증이 담긴 책을 읽고 배운 기도다. 아주 쉽고 단순한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나를 참 많이 도와주셨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어느 한순간도 내 곁을 떠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이 그동안 나를 도와주셨으니 나도 이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때가 온 것이 아닐까? 나는 저 물장수 소년같이 아무것도 없는 데서 시작했다. 돈도 미래도 희망도. 그러니 내가 두려운 것이 무엇이 있으랴!
물장수 소년이 내 마음을 뒤집어놓고 떠난 뒤라 기분이 묘했다. 럭셔리한 호텔, 음식, 파티를 뒤로한 채 나는 짐을 호텔에 맡기고 배낭에 간단한 옷과 책을 쓸 컴퓨터만 매고 떠났다. 워낙 없이 산 적이 있어서 그런지 진정한 여행은 편안하고 안락한 여행이 아니고 고생하면서 다른 문화를 좀 더 깊숙이 체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행 패키지나 좋은 호텔에 묵는 것보다 민박하면서 주민들과 생활하는 것이 여행의 참 맛이라고 생각한다. 만리장성이나 자금성 같은 명소를 보는 것은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츄안디샤는 중국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500년 묵은 옛 도시를 재개발하지 않고 그대로 보전해 마을 사람들이 돌과 나무집에 살아가며 양을 치거나 민박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우리나라의 민속촌이나 안동 하회마을 같은 곳이었다. 자동차로 두 시간 걸리는 거리였는데, 나는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6시간이나 걸려 어둠이 내린 저녁에야 마을에 도착했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서 시외버스를 탔는데, 어디서 내려야 할지 몰라 차장에게 내가 가는 츄안디샤라는 곳을 몇 번이나 각인시켰다. 결국 버스 차장은 버스 안에서 혹시 영어 하는 사람이 있냐고 공고하여 어떤 한 여자분을 찾아내서 나에게 통역을 해주었다. 내가 가는 곳은 버스가 서지 않는 곳인데 버스에서 내려서 택시를 타고 10킬로미터를 더 들어가야 했다. 워낙 시골이라 택시가 없어 불법으로 운영되는 자가용 버스를 타야 된다고 했는데 다행히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다.
첫날밤 묵은 숙소는 매우 지저분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냥 잤다. 둘째 날은 좀 더 깨끗한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민박은 한화로 약 만 원 정도니 참 싼 편이다. 산꼭대기에 있는 집을 얻었는데 신문지로 도배가 되어 있었고, 벌레도 많이 지나다녔다. 아침을 먹고 나서 중국식 랜턴이 있는 아름다운 마루에서 책을 쓰고 있는데, 중국 친구들이 와서 사진도 찍어 주었다.
셋째 날은 동네에서 열리는 장에서 토산물을 판매하는 것을 구경하기도 하고 현지 음식을 먹기도 했다. 양고기도 먹고 중국 고량주를 마셨다. 그곳은 500년 전의 도시의 전통을 이어가는 곳이라 그런지 양치기들이 많았다. 오후에는 양치기들을 따라 산행을 하기도 했다. 마지막 날은 베이징에서 온 친구들과 베이징에서 같이 식사도 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친구는 한국문화를 좋아해서 신혼여행도 한국으로 갈 것이라며 한국말을 썩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