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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Nov 27. 2022

분수 다방

루저의 헌팅



몇 달을 화실에 박혀 전시회 준비만 했다.

사회, 경제, 문화 세상 돌아가는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술 먹다 자고, 새벽에도 술기운에 그림 그리고 그것도 지겨우면 옥상 화분에 심어놓은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을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온 분수 다방은 변함없이 정겨웠다.

한가운데 어른 키만 한 분수가 여전히 힘차게 물을 뿜어냈고,  Music Box 안에는 LP 판이 한벽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음반의 반 이상은 백판이라,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바늘 튀는 소리도 하나의 악기처럼 자연스럽게 신청곡과 어우러졌다.

 따듯한 오후의 창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여대생들은 하나같이 영문으로 된 책을 가슴에 안고 청바지에 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나는 공순이가 아니고 대학생이요.

나는 지성인이니 함부로 보지 마시오.

걸음걸이에 잘난 체가 따라다녔다.


중저음의 DJ가 카운터에 전화 왔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데모 때문에 차가 막혀 늦을 것 같다는 친구의 전화였다. 

그 무렵 민주화운동은 산불처럼 번져나갔고 대로변에 위치한 동성 화방과, 무림 서점은 며칠째 문을 닫았다.

시내버스도 시위 현장을 피해 정해진 노선을 벗어나 우회하고 있었으므로 약속 시간을 지키기엔 불가항력이었다.

다방에 오는 동안 두 번이나 검문을 당했다.

가방 열어보고 손바닥 검사, 손에 흙이라도 묻어있으면 어김없이 대통령을 향해 돌팔매질한 놈으로 찍혀서, 내 또래 전경이 묻는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을 해줘야 했다. 

전경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여대생이 죽었다거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불구가 되었다는 암울한 소문만 퍼져갔고, 정부의 담화문에서는 불온세력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린다고 연실 변명을 해댔다.

 다수의 국민들을 불온세력으로 만들어 버.


Music Box 작은 구멍으로 신청곡을 집어넣었다.

Smokie-Living Next Door to Alice

기타의 전주가 창가로 내려앉는 오후의 햇볕을 잘게 쪼개 주었다.

재떨이 점쟁이에게 50원 주고 오늘의 운세를 보았는데, 이놈의 점쟁이는 올 때마다 귀인을 만날 거라 사기를 쳤다.

건너편 테이블에선 세련되고 차갑게 보이는 여자 둘이 연신 담배를 피우면서 깔깔대고 있었다.

재떨이 점쟁이 말대로 귀인들 일까.

친구도 늦어지고 심심한데 쟤들이나 꼬셔야겠다.

다방 레지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이것 좀 저분들께 전해주세요."

'친구가 늦게 올 것 같은데 친구 올 때까지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반 접은 메모지를 건넸다.

팝송 두 곡을 듣는 시간이 지나, 레지가 껌을 질겅거리며 그들의 대답을 가지고 왔다.

"아씨! 꿈 깨시라는데요."

고소하다는 듯 피식거리며 빈 커피잔을 가지고 갔다.

쓰벌 망했다.

쪽팔렸다.

친구라도 같이 있으면 덜할 텐데 다방의 모든 사람들이 나만 보고 있는 것 같아 표정관리도 안 되고, 빨리 도망가야겠다.

메모판에 친구에게 전하는 메모지 꽂아놓고 황급히 달아나려는데, 레지가 큰소리로 불러 세웠다.

"아씨! 담배 가져가세요."

우라질, 당분간 분수 다방은 오지 말아야겠다.

친절한 DJ가 뒤통수에 대고

Paul Anka-Crazy Love를 크게 틀어주었다.


거리엔 아직도 매캐한 최루탄 냄새와 시위의 잔해들로 어지러웠다.

운동권 선배가 말했듯이 정치에 관심 없으

정말 사회의식도 없는 무기력한 청춘일까.


옥상의 소피아 로렌이 보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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