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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Dec 12. 2022

오전의 일탈


"나 많이 늙었지?"

K의 첫마디였다.


25년 전 짧지만 긴 여운만 남았던 K를 우연히  인사동에서 만났다.

서로가 첫눈에 알아본 것을 보면  옛 모습이 조금은 남아있었나 보다.

목에 주름이 있는 거 빼고는 50대 중년 여성 치고는 관리를 잘한 거 같다.


늦가을 평일 오전의 전통찻집에 손님이라곤 둘밖에 없었고 첼로 소리와 어색함만이 앙증맞은 찻잔에 담겨 있었다.

실없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어색함은 그대로였다.

그때는, 나도 K도 오랜 기간 만나는 이성이 있었고 바람을 피우는 입장이었다.

서로가 지루한 사랑의 권태로움에서 일탈을 꿈꾸고 있었을까.

K는 만나던 그 남자와 결혼을 했고 나는 그렇지 못했다.


국화차 향기가 사라질 때까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서로의

살아왔던 얘기만 했지 그때의 추억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지리산 자락, 민박집의 달콤한 속삭임도 학사주점의 동동주도, 분수 다방 창가의 햇살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얘기하면 더 어색해질 거 같기도 했고, 나에겐 추억이지만 K에게는 젊은 날 지우고 싶은 기억일지도 모를 것이다.

그저, 그때가 좋았지란 말로 뜨거웠던 여름날의 추억을 퉁쳤다.

"우리 그때 두 달 만났지?"

K가 수줍게 웃으며 내가 망설이던 말을 하고 말았다. 눈가의 주름이 예쁘다.

그랬었다. K는 나에게 여름날 소나기처럼 잠깐 왔다 갔었다.


나이 먹고 추억을 얘기하는 것보다 신나는 일은 없다. 아련한 그때로 돌아가 다소 수다스러워졌고

어색함은 국화차와 함께 마셔버렸다.

텅 빈 찻집에 중년 남, 여의 두런거리는 소리와 가끔 그녀의 웃음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렸다. 사소한 실수까지 기억하는 K가 고마웠다.

여행 가던 날 아침 그녀를 기다리던 청량리역의 설렘과, 민박집에서 석유 버너가 고장 나 옆방의 커플에게 신세 졌던 아침밥, 서로의 애인 눈을 피해 만나던 스릴도 이제는 가슴 절절한 젊은 날의 그리움이 되고 말았다.


근처에서 남편과 점심 약속이 있다는 그녀와  시간이 남아 북촌 길을 걸었다.

북촌은 역시 가을에 와야 한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소품 숍들과 은행잎, 기와집의 담벼락, 걸을 때 그녀의 손이 스칠 때면, 어릴  건전지를 혓바닥에 갖다 댔을 때의 짜릿함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심박수는 정점을 찍었다.

그녀도 나와 같을까?

같을 거라 믿고 싶었다.

손이라도 살짝 잡아볼까, 용기를 내볼까, 그녀가 잡았던 손을 빼기라도 하면 그 쪽팔림은 어떻게 감당하지. 25년 만에 만나서 속물 같은 생각을 하다니, 죽기 전까지 철들긴 글렀나 보다.

이 생각 저 생각 혼자서 김칫국을 항아리째 마셔버렸다.

손이 스칠까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넣었다.

바람이 불었다.

그렇게 25년의 세월이 압축되어 북촌 길바닥에

떨어졌다. 그 위로 은행잎이 덮이고 시간이 쌓였다.


"건강해"

우연히 기적처럼 만날 때까지 서로의 안녕을 바라며 헤어졌다.

서로의 연락처도 물어보지 않았다.

생각하면 잘한 일인 거 같다.

연락처라도 알고 있으면 그 순간부터 번민이 시작되는 것이니까.

오늘 몇 시간의 설렘과, 두근거림과, 망설임들이

그녀도 똑같이 느꼈던 감정이었길. 오늘 봤던 내 모습 늙었다 실망하지 않길. 가끔은 기억해 주길......


다행히 아내에게 조금만 미안해도 되겠다.

굳이 K 만났던 일을 아내에게 고백 안 해도 양심에 가책은 받지 않겠다.

완벽했던 늦가을 오전이었다.



개업한 지 이틀 됐다는 집 앞 빵집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파운드케이크 하나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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