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bum by Grimes
인류혐오자와 인류세가 겹쳐진 거창한 타이틀을 등에 업었지만 그라임즈는 여전히 본인다움을 잃지 않았다. 그전만큼의 확연한 발전은 없어 보이더라도 여전히 흥미롭고, 여전히 즐겁게 들을만한 음악이다.
두 장의 앨범을 통해 그라임즈는 DIY 정신, 문화 혼종성, 그리고 적극적인 서브-컬쳐 소스의 사용 등이 뒤섞인 2010년대 인디 씬과 더 나아가 팝 씬을 상징하는 대표 인물로 등극했다. 그리고 그녀의 2020년대 첫 작품 Miss Anthropocene은 훌쩍 성장해버린 클레어 부셰의 위치처럼 거창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라임즈의 음반이다. Visions의 이세계적인 분위기와 Art Angels의 선명한 팝 멜로디가 혼합된 음악 속에 그녀가 다루는 주제는 그전 보다 사회적인 문제들이나, 이번에도 그라임즈는 지극히 그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것들을 풀어낸다. 물론 그 방식의 깊이는 얕을지라도 말이다.
앨범 발매 전 이뤄진 라나 델 레이와의 인터뷰에서, 그라임즈는 본인이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 신화 속에 등장하던 무수한 관념과 사건, 사물을 대표하는 신들의 존재를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음을 밝혔다. Miss Anthropocene은 이러한 고대적인 발상을 모티프로 하면서 현대에 맞는 요소들을 신이나 악마들로 만들어 채우고 있다. 일부 예시를 제외하면 다루는 내용이 어떻든 기본적으로 화자가 클레어 부셰 본인이었던 기존의 앨범들과는 극명하게 드러나는 차별점이다.
열 개의 트랙 중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약물 중독을 주제로 삼은 “Delete Forever”다. 그라임즈 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생각나던 짙은 신스 사운드를 벗어나 어쿠스틱한 기타와 벤조 선율이 전면에 세워진 이 컨트리풍의 트랙은, 그녀가 여태 몸담아오던 신비로운 분위기의 일렉트로닉 음악의 영역을 벗어났음에도 여전히 훌륭한 음악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약물 중독자의 입장에서 쓴 간결하면서도 멜랑콜리함을 확 풍겨내는 가사 - “But I can’t see above it, guess I fucking love it” - 는 평소답지 않게 힘을 쫙 뺀 보컬과 일체감 있게 어우러진다. 작사가로서의 그라임즈의 역량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트랙은 래퍼 릴 핍이 죽은 날 완성되었다는 뒷이야기와 함께 서사적으로도 더 풍부해진다. 후반부에 놓인, 자살을 끝으로 생을 마감한 이가 되어 노래하는 “You’ll miss me when I’m not around”의 가사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담백하게 툭툭 내뱉는 언어가 오히려 서글픈 감정을 극대화 시킨다.
이런 따스하면서도 감정적인 노래와는 정반대로, 발리우드 영화 <바지라오 마스타니> 속 마살라 음악을 샘플링 하여 사이버 펑크 느낌으로 재해석한 테크노 트랙 “4ÆM”은 SF 액션 영화의 전투 장면에서 깔릴 만한 긴박함을 조성해준다. (실제로 이 트랙은 게임 <사이버펑크 2077>의 사운드트랙이기도 하다) 주술을 외우는 것 같은 특유의 팔세토 보컬과 마치 전투용 로봇에 입력된 사이버 음성처럼 차갑고 건조하게 들리는 목소리의 대조가 특히 두드러진다. 본인의 목소리를 다른 악기와 다를 것 없이 하나의 도구로 사용해왔던 그녀의 내공은 이 노래에서도 여전히 이어진다. 딱딱한 분위기와는 대비되는 낭만적인 내용의 가사가 만들어내는 아이러니한 조화로움까지 인상적이다.
Miss Anthropocene이 나오기 전 앨범의 핵심 주제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던 환경파괴 문제는 프로듀서 i_o와 함께한 첫 싱글 “Violence”에서 만날 수 있다. 앨범 타이틀에 실린 “인류세”와 직접 연결되는 곡에서 그라임즈는 댄서블한 트랜스 비트 속에 지구와 인간의 관계를 폭력 석인 애정의 관계, 사랑 섞인 파워 게임으로 표현한다. “기후변화를 즐겁게 만들고 싶다”던 그녀의 포부는 몽환적인 신디사이저 프로덕션과 하늘하늘한 음색이 빚어내는 케미스트리 덕분에 어느 정도는 성공적으로 구현된다. 전 지구적인 환경 오염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을 기대했다면 실망스러운 접근이겠지만, 애초에 그라임즈가 아티스트로서 지닌 가장 근원적인 매력은 본인의 입맛에 맞는 소스를 골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음악에 투영하는 것이었으니 어쩌면 이 노래는 지극히 그녀다운 발상이다.
앨범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사랑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사랑이 여러 방면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막아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던 클레어 부셰의 심리는 오프닝 트랙 “So Heavy I Fell Through the Earth”에 녹아 들어있다. 제목처럼 몸을 강한 중력에 우주 공간에서 지상으로 서서히 침전하게 만드는 묵직한 중력의 느낌이 실체화된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는 이제 그녀가 뮤지션 외에 일론 머스크의 연인 등의 수식어로 서서히 덧입혀지는 현실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하지만 엔딩 트랙 “IDORU”는 그 앞의 분위기와는 어긋난다고 느낄 정도로 희망차게 사랑을 노래한다. 그라임즈가 여태 그려온 기이한 세계에서는 기대하기 힘들었던 순수한 로맨스의 주제는 아기자기한 이펙트와 여린 그녀의 음색이 만들어내는 풍경 속에 아름답게 자리한다. 현대 사회의 온갖 병폐와 그 위에 드리운 절망을 한껏 노래하지만, 그럼에도 그라임즈는 우리에게 사랑이 빚어내는 희망의 소중함을 터무니없이 보일 정도로 낙관적인 태도와 함께 설파한다.
5년의 공백기 동안 쌓아 올려진 기대감에 비하면 아쉬움을 가지는 트랙들도 있다. 전작의 “Scream”에서 기용했던 대만 래퍼 潘Pan에 대한 평가가 대체로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Darkseid”라는 트랙에서도 그녀와 합을 맞춘 그라임즈의 고집에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나름대로 거창한 가사를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My Name is Dark”는 Art Angels의 아웃테이크 느낌을 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제목만 보면 앨범의 키 트랙이 되어야 할 “New Gods”의 가사는 너무나도 단편적이다. 과연 각종 매체와의 인터뷰를 읽지 않았을 때, 음악 자체만으로 그녀가 구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청자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명쾌하게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여태까지 본인이 다뤄왔던 소재에 비해 확연히 커진 규모로 인해 그라임즈의 다섯 번째 앨범은 어딘가 버거워 보이는 앨범처럼 다가오는 느낌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21세기 사회의 온갖 문제들을 다른 소재들과 다르지 않게, 거리낌 없이 가벼운 태도로 마주한 채 그것들을 노래하는 태도를 보면 오히려 이런 거대한 이야기에 함몰되지 않고 무거운 주제를 자유분방하게 다루는 신세대 아티스트로서의 그녀의 정체성이 돋보인다. 그러는 동시에 앨범의 이런 식의 접근법은 환경문제를 깊이감 없이 소비하는 현대 사회와 미디어를 거울처럼 비춰주는 것 같기도 하다. 미래지향성과 시대정신, 당신이 이 둘 중 어떤 것을 질문하더라도 Miss Anthropocene은 그럴싸한 답변을 던져준다.
(원 게시일: 20.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