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쓰러졌다
아버지가 대장암 수술을 마치고 몇 달간의 병원 생활 끝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팔순의 노구로 간병을 도맡았던 엄마는 드디어 두 다리를 뻗고 주무실 수 있었다. 그러나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여러 형제를 전쟁과 병으로 잃고 작은아버지와 단둘이 남으셨다. 그런 아버지가 첫 교편을 잡은 괴산에서, 따뜻하게 호의를 베풀어주신 동네 분과 의형제를 맺으셨다. 형님 동생하면서 지낸 관계는 괴산을 떠나온 후에도 계속되었고 우리 가족에게는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형제 같은 큰아버지가 생겼다. 큰아버지의 아들, 우리에겐 ‘큰오빠’로 불리던 분의 딸, 지영이가 대전에 취업하게 되었다.
과년한 딸을 혼자 도시에 내놓기가 걱정된 큰오빠는 지영이를 엄마께 맡겼다. 마침 자식들이 다 출가한 뒤라 빈방이 있었기에 부모님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우리도 노인들만 계시는 것보다는 젊은 사람이 함께 지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별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어쩌다 친정에 가보면 젊은 애는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있는데 밥해주고 빨래 다 해주는 엄마를 보고 있노라면 속상하기도 했다. 같이 살면 엄마의 일손을 덜어줄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엄마의 부담은 오히려 늘어갔다. 한소리 할라치면 극구 말리는 엄마 때문에 속상한 마음을 깊은 한숨 속에 묻어두어야만 했다.
어느 날 큰오빠 부부가 친정집을 방문했다. 엄마 밑에 있던 큰오빠 딸, 지영이가 결혼하여 같은 대전에 살고 있었음에도 오빠 내외는 엄마 집에서 2박 3일을 머물렀다. 팔십이 넘은 나이에 손님을 대접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우리 먹는 대로 차리는 거라 힘들지 않다’고 늘 말씀하시지만 손님 상을 제사상 차리듯 준비하시는 엄마에게 그 말이 사실일 리 없었다. 잔뜩 굽은 허리로 며칠간 손님을 맞이한다는 것은 엄마에게 큰 무리가 되었을 테고, 그 여파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큰 오빠네가 떠난 날, 엄마는 혼자 목욕탕에 다녀오셨다. 그동안 쌓인 피로가 더해졌던 탓인지, 목욕 후 심한 두통에 시달리며 간신히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께 두통약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지만, 머리는 점점 깨질 듯이 아파 왔고 약을 사러 간 아버지를 기다릴 수 없었다. 청심환을 꺼내려 해봐도 손이 말을 듣지 않아 약통조차 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급히 약국을 찾은 아버지께 증상의 심각성을 파악한 약사는 119를 불러 빨리 응급실로 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버지는 지체 없이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의 진단은 뇌졸중이었다. 골든타임을 지키는 것이 생사를 가르는 중대한 질병, 뇌졸중. 아버지의 빠른 대처가 아니었다면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약사의 조언에 따라 즉시 119를 부르고, 응급실로 모시고 간 덕분에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았고 수술도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서울에 사는 나에게 소식이 전해진 건 뒤늦은 시간이었다.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엄마는 이미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로 옮겨져 계셨다. 중환자실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무거운 침묵이 나를 짓눌렀다. 하루에 두 번, 오전 10시와 오후 7시에만 허락된 30분 동안의 면회시간, 면회를 위해 일회용 가운과 장갑을 착용한 후에야 한 명씩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렵게 엄마를 마주한 첫 순간, 나는 말을 잃었다.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계신 엄마의 모습은 내가 알던 강인한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얼굴은 풍선처럼 부어 있었고, 눈을 뜨지 못한 채 누워계셨다. 항상 우리 가족의 보호자였던 엄마가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해진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말없이 누워계시는 엄마를 마주하며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낯선 엄마의 모습에 죄책감과 안타까움이 뒤섞였다. 거센 파도가 가슴을 훑고 지나가듯 파도의 파편들이 조각조각 가슴을 후려쳤다. 짧은 면회시간 동안 엄마의 손을 꼭 잡고 후유증 없이 회복되기를 기도했다. 평생 우리 가족을 위해 고단함도 내색하지 않으셨던 분이 이렇게 처음으로 병실 침대에 누워 계셨다.
엄마가 쓰러지기 전까지 당연하게만 여겼던 것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엄마의 손맛이 담긴 음식들, 언제나 우리 곁을 지켜주시던 따뜻한, 시선, 그리고 말없이 베풀던 헌신까지. 엄마는 한 번도 당신의 고단함을 내색하지 않으셨다, 그런 엄마를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당연한 존재로만 여겼던 것은 아닌지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엄마의 병상 앞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돌봐야 할 차례라는 것을. 삶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시련을 안겨주지만, 그 시련이 가족을 더욱 단단히 묶어주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엄마가 쓰러지던 날은 가족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그날 이후 우리는 엄마를 중심으로 더 끈끈하게 뭉쳤다. 엄마가 계셨기에 우리는 함께였고, 엄마가 강했기에 우리도 강할 수 있었다. 엄마가 처음으로 쉬는 이 시간은, 단지 휴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또 다른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