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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기억나?

몇 년만의 나들이

by 우먼파워

“엄마, 오늘 대청댐 갈까?”

“.......”

“싫어? 어? 좋다고?”

“.......”


아무런 대답도 없이 초점 잃은 눈만 껌뻑거리는 엄마를 모시고 우리는 대청댐을 가기로 했다. 엄마의 하루하루는 병원의 차가운 공기와 고요한 침묵 속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병실 창문 너머로 비치는 햇살조차 닿기 어려운 곳, 그곳이 엄마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점점 기력이 쇠해가는 엄마를 보며, 따뜻한 바람 한 줄기, 싱그러운 햇살 한 조각이라도 선물해 드리고 싶었다. 잠시라도 세상의 온기를 느끼게 해드리고 싶은 것, 그것이 나의 작은 바람이었다.


하지만 엄마를 병원 밖으로 모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오랜 병원 생활로 몸이 굳어질 대로 굳어버린 엄마를 차에 태우는 것조차 큰 도전이었다. 그래도 꼭 바깥 공기를 쐬게 해드리고 싶었다.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내 마음을 급하게 했다. 병원 측의 도움을 받아 조심스럽게 엄마를 차에 모셨고, 마침내 우리는 병원을 벗어났다.


대청댐으로 향하는 길, 창 밖으로 푸른 산자락이 부드럽게 이어지고, 노랗게 물든 들판이 따뜻한 가을 햇살 아래 은은하게 빛났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고, 길가의 감나무에는 주홍빛 감이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저 멀리 대청호의 잔잔한 물결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고, 그 위를 유유히 떠가는 흰 구름이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엄마가 이 풍경을 온전히 느낄 수 있기를, 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싱그러운 바람과 햇살이 엄마의 얼굴을 어루만져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호수 주변의 나무들은 저마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가을을 노래하는 듯했다. 새들이 하늘을 유유히 가로지르며 날아가고 한가로이 데이트하는 한 쌍의 커플이 평온한 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대청댐1.jpg


"엄마, 괜찮아?"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조심스레 얼굴을 살폈다. 희미하게 뜬 눈은 여전히 흐릿했고, 몸은 힘없이 늘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바깥 공기가 엄마에게 작은 힘이라도 되어주길 바랐다. 따뜻한 햇살이 엄마의 희끗한 머리 위로 부드럽게 내려 앉았지만, 엄마는 오랜만에 마주한 빛이 낯선 듯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너무 오랜 시간 병원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만 지내온 탓에 따뜻한 바람조차 엄마에게는 버거운 듯 보였다.


우리는 엄마가 탄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대청댐 주변을 거닐었다. 한 줌의 기억이라도 떠오를까 싶어 조심스레 이야기를 건넸지만, 엄마는 그저 멍하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엄마가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 왔던 곳이었는데 이곳의 추억도 더 이상 엄마를 붙잡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걸어보았지만, 엄마의 반응은 없었다. 마치 시간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엄마를 우리 곁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만 같아 가슴이 저며왔다.

“엄마, 좋아?”

몇 번이고 물었지만, 엄마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햇살을 맞고 있을 뿐이었다. 엄마의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스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애가 탔다. 기쁨도, 반가움도, 그리움도 표현하지 않는 엄마의 모습에 마음 한쪽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엄마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더 남아있을 때 모시고 왔다면, 이 따뜻한 바람을 반가워하고, 햇살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에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 시간이 우리에게 더 넉넉히 주어졌다면, 엄마가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때 이곳에 왔다면, 오늘 이 순간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아쉬움만이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돌아오는 길, 우리는 잠시 용전동 집에 들르기로 했다. 엄마가 평생을 바쳐 가정을 일군 곳, 젊은 시절을 보내며 자식 넷을 정성껏 키워낸 공간. 기쁨과 눈물이 함께 스며든 그 집을 다시 바라보며 엄마가 오래된 기억의 한 조각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랐다.

"엄마, 이 집 기억나?"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깊은 침묵뿐이었다. 엄마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그저 천천히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예전의 우리 집은 그대로였다. 벽도, 창문도, 마당의 작은 나무도 변하지 않았건만, 정작 엄마의 기억은 안개처럼 희미해져 있었다. 그곳에서 함께 웃고 떠들던 수많은 순간들, 가족이 둘러앉아 식사하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 김장을 하던 시간들이 엄마의 마음속에서 온전히 사라진 듯했다. 창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지만, 엄마의 눈동자는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았다. 이 나들이가 정말 엄마를 위한 것이었을까. 엄마를 위해서라고 믿었지만, 결국 나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엄마의 반응 없는 모습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 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는 지친 듯 눈을 감았다. 잠깐의 외출조차 버거운 일이 되어버린 엄마를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혹시라도 엄마를 더 힘들게 한 건 아닐까, 효도를 빙자한 무모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하는 자책이 밀려왔다. 창밖으로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붉고도 부드러은 빛이 하늘을 물들이는 모습이 꼭 엄마의 뺨에 내려앉은 햇살처럼 따뜻해 보였다. 나는 조용히 엄마의 손을 잡았다. 비록 기억은 흐려지고 몸은 예전 같지 않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엄마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 그렇게 마음을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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