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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에 머무는 사랑

엄마의 변화

by 우먼파워

어느 날부터 엄마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치매를 앓고 있었지만, 흔히 떠올리는 치매 환자들과는 조금 달랐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말수가 줄기는 했어도 여전히 사람들을 좋아했고, 병원에서 가끔 마주치는 사람에게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남들처럼 갑자기 집을 나가거나 소리를 지르며 난폭해지는 일도 없이 엄마는 조용하고 온순한 치매 환자였다.


그랬던 엄마가 어느 날부터 아버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네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다."


엄마는 나더러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고는 다른 사람이 들을까 봐 주변을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큰 수술을 여러 차례 받고 기력이 쇠할 대로 쇠한 팔십 넘은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다니, 처음엔 황당해서 웃어넘겼다. 하지만 엄마의 확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어졌다. 건너편 병실에서 남자 환자의 신음 소리만 들려도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고 믿었다.


아버지가 담석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엄마의 의심은 점점 더 강해졌다. 아버지가 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도, 다른 여자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엄마를 찾지 않는 거라고 단정했다. 어떤 날은 아버지가 여덟 명의 여자를 만났다고 했다가, 또 다른 날은 스무 명을 만나고 갔다며 서운해했다. 급기야 아버지가 오셔도 만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엄마의 변화가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 치매로 인해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현상임을 깨달았다. 엄마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웠고, 가장 소중한 사람을 의심하는 형태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아버지를 마음에서 놓아주기 위한 과정이었는지도 몰랐다.


어느 날, 엄마는 불안한 얼굴로 다시 나를 불렀다.


"네 아버지가 어젯밤에 또 왔다 갔어. 그런데 이번에도 나한텐 오지 않았어."


엄마의 눈빛은 초조함으로 가득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의심은 더욱 심해졌고, 그와 함께 아버지를 향한 분노와 서운함도 커져 갔다. 애처롭게도 보이지 않는 존재와 싸우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엄마는 단호했고 그렇게 의심과 불안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우리 곁을 떠나셨다. 충격과 슬픔이 몰려왔자만, 이상하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엄마의 불안과 의심도 함께 사라졌다. 마치 긴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아버지를 의심하고 원망하던 모습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더 이상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버지와 함께했던 기억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하셨다.


"너희 아버지는 말이야, 무뚝뚝해 보여도 참 자상한 사람이었어."


엄마의 목소리엔 더 이상 초조함도 불안함도 없었다. 엄마를 사로잡았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어쩌면 아버지를 잃을까 봐 느낀 두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치매가 기억을 흐리게 만들었지만, 사랑까지 지울 수는 없는 듯했다. 엄마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잊어갔지만, 아버지와의 행복했던 순간만큼은 끝까지 붙잡고 계셨다. 엄마가 아버지를 의심했던 것은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 그만큼 아버지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아버지가 멀어질까 봐, 혹은 놓칠까 봐 두려워서 그렇게 매달리셨던 것 같다.


아버지가 떠나신 후, 엄마는 한동안 아버지를 그리워하셨다. 왜 병원에 안 오시는지, 어디 계시는지 수도 없이 묻고 또 물으셨다.

우리는 차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엄마가 마음의 평안을 찾았는데, 아버지가 떠나셨다는 사실을 알면 병이 다시 더 깊어질까 봐. 우리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영국으로 치료받으러 가셨어요.”

마침 오빠가 세미나에 참석 차 영국에 갈 일이 있었기에 이야기는 더욱 그럴듯했다. 처음에는 의아해했지만, 모든 자식들이 똑같이 얘기하는 것을 보고는 믿으시는 듯했다.


그날 이후, 엄마는 문만 바라보며 아버지를 기다리셨다. 언젠가 병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올 것처럼. 평소처럼 간식을 챙겨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실 아버지를 매일 기다리셨다. 우리는 그런 엄마의 곁에서 말없이 손을 잡아드릴 수밖에 없었다. 차마 진실을 전할 용기가 없었고, 엄마의 세상에서 아버지가 계속 살아 있기를 바랐다.


시간이 흐르며 엄마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졌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엄마 곁을 지키고 계셨다. 손에 닿지 않는 곳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엄마의 세상에서 아버지는 한순간도 떠나지 않으셨다. 그리고 5년 후, 엄마는 마침내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이번에는 아무 의심도 불안도 없이, 온전히 평온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다시 만나셨을 것이다. 이제 우리도 남겨진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때때로 밀려오는 그리움에 가슴이 시리지만, 두 분이 다시 만나 함께 계실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그리움을 안고서도 미소 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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