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난 자리에 내가 남았다.

1부 : 불 꺼진 집, 8장

by 여우비

어떤 날은 노래도 없었다.

그저 술에 취한 채, 아빠는 우리 형제를 잠들게 두지 않았다.

새벽이 깊을수록 그의 말은 길어졌다.

“영민아, 영락아, 너희는 아빠처럼 살지 마라.”

“엄마한테 잘해라. 그래야 사람이 돼.”

말들은 옳았지만, 이상하게 슬펐다.

술기운에 뒤섞인 진심은 언제나 늦게 도착했고,

그 말이 끝나면 또 한 잔을 따랐다.


어떤 밤엔 아빠가 이유 없이 울었다.

“죽으면 다 끝날까…”

그 말을 남기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빠의 어깨가 들썩였지만, 나는 다가가지 못했다.

‘아빠가 죽으면 엄마가 아프지 않겠지’

그 생각이 머리끝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아빠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또 다른 밤이 찾아왔다.

나는 아빠에게 맞은 팔을 붙잡고 이불속에서 눈을 떴다.

엄마는 지쳐 거실에서 쓰러져 있었고,

형은 세상모르고 코를 곯았다.

나만 깨어 있었다.


문틈 사이로 불빛이 스며들었다.

아버지의 발소리였다.

나는 자는 척을 했다.

그의 손이 내 팔 위에 닿았다.

무겁고 거칠었지만, 묘하게 따뜻했다.

손끝이 상처를 더듬었다.

잠시 멈춘 뒤, 차가운 감촉이 스쳤다.

연고였다.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소리만 들렸다.

그 숨이 내 팔에 닿을 만큼 가까웠다.

그리고 아빠가 울고 있었다.

억눌린 울음이 공기 속으로 번졌다.


아빠가 떠난 뒤에도 약 냄새는 방 안에 오래 남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 냄새를 맡으며 생각했다.

‘폭력성과 다정함을, 어떻게 한 사람이 동시에 가질 수 있을까.’

답을 찾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했다.

“영락아, 밥 먹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웃었다.

그 웃음이 싫었지만,

이상하게도 가끔 그 웃음이 보고 싶었다.


나는 아빠를 완전히 미워할 수 없었다.

웃는 얼굴,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의 온기,

뒤엉킨 감정 속에서

나는 방향을 잃었다.

아빠를 증오하는 순간에도,

그리워했다.


그 시절의 나는, 어쩌면 너무 일찍 어른이 된 아이였다.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동시에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너무 일찍 배워버린 아이.

그리고 나는, 그 모순 속에서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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