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난 자리에 내가 남았다.

2부 : 끊긴 신호음, 6장

by 여우비

잠시, 기억이 나를 불렀다.

기억은, 아빠와 엄마의 첫날이 있었다.


내가 열 살 때,

엄마와 아빠는 뒤늦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땐 몰랐다.

나이를 먹고 세상을 조금씩 알아갈 즈음에야

부모의 결혼식에 초등학생, 중학생 아들 둘이 참석하는 일이

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객들이 다 모였는데,

아빠는 또 늦었다.

결혼식 전날만큼은 술을 안 마시겠다던 약속은

그에게는 늘 ‘내일의 이야기’였다.

엄마는 드레스를 입은 채 대기실에 앉아

그 약속이 또 깨졌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두 아이를 낳고도,결혼식조차 제때 오지 못하는 사람.

그날, 나는 처음으로

‘엄마의 웃음이 왜 그렇게 얇았는지’를 알았다.


결혼식이 끝나고도 아빠의 삶은 불안정했다.

인력사무소에 나가 일하기도 했지만

무릎이 아프다며 며칠씩 쉬거나,

비가 오면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쉬다 보면

집엔 다시 술 냄새가 배어 있었다.


엄마는 그 속에서도 우리 형제를 지켜야 했다.

낮에는 파출부, 밤에는 식당일.

하루 종일 집을 비워도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는 우리에게만큼은 부족함이 없길 바랐다.

준비물이 없어 선생님께 혼날까,

용돈이 없어 친구들에게 무시당할까 걱정하며

밤마다 손을 놀렸다.


첩첩산중에 보증빚도 갚아야 하니

새벽엔 목욕탕 청소까지 하셨다.

그렇게 버텨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학교에 회비를 내지 못한 날,

선생님은 나를 조용히 불러 식권 몇 장을 쥐여주셨다.

두 번째 온정이었다.


기억이 스러지자, 공기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시계 초침이 유난히 크게 들렸고,

그제야 현실이 다시 무게를 되찾는 듯했다.


비행기 출발까지 두 시간 남았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 안엔 아빠의 냄새가 맴도는 듯했다.

그 냄새는 술이 아니라, 오래된 시간의 냄새 같았다.


“오빠, 짐 다 챙겼어?”

현서의 목소리가 거실 쪽에서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가야지.’”


공항으로 가는 길, 차 안은 조용했다.

창밖으로 스치는 제주의 겨울바람이 유난히 더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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