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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보이스 피싱

초청3

by 다날


죄책감도 경쟁이 될까?

이것보단 이게 더 나쁘고 그래서 이게 더 마음에 찔리는데 처럼.


최근 들어 보이시 피싱 서사에 변화가 생겼다. 가족의 안위와 돈으로 협박하는 일차원적 방법을 자제하는 듯하다. 가구의 형태가 급격히 변화면서 단절된 소통을 악용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지 않았을까. 우리 집만 해도 우리 가족만 알 수 있는 암호를 정해 놨으니 말이다. 아무리 치밀해도 우리와 가장 오래 살았던 강이지의 이름까진 알 수 없다.


하지만 보다 악랄해졌다. 이제 000 씨 맞으신가요? 란 클리셰를 사용하지 않는다.

"000 씨 앞으로 보낸 등기가 반송돼서 전화드렸습니다."

"무슨 등기요?"

"법원 등기입니다. 우체국 직원이 어제 오후에 방문했는데 댁에 안 계셔서 반송처리 됐습니다."

"등기 내용이 뭔가요?"

"그건 본인만 직접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내일은 오후에 댁에 계세요?"

"근데 주소가 어디로 되어 있나요?"

질문이 다소 신선했는지 약간 당황한 듯한 정적이 흘렀다.

"그, 주민등록등본 상의 주소로 갈 겁니다."

"아, 네. 그럼 그쪽으로 보내 주세요."


저쪽에서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보이스 피싱의 냄새가 짙었다. 네이버에 '법원등기 보이스 피싱'으로 검색하니 똑같은 레퍼토리의 글들이 많았다. 다만 내가 내일 집에 없었으면 이상한 링크에 빠졌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주소도 모르는 애한테 돈이라도 있을까 싶어 허탕으로 분류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법원의 힘은 강했다.


보이스 피싱인 걸 알면서도 왠지 모를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 맞다. 올해 내가 예비군을 안 갔나? 메일을 뒤져봤다. 아직 올해는 통지서조차 날아오지 않았다.

아 그럼. 공과금을 안 냈나? 자동이첸데. 그게 밀렸나? 아니지. 그게 밀렸으면 내 계좌가 정지됐다는 건가? 전기도 들어오고 온수도 나왔다.

아 아니면. 얼마 전 밤 골목에서 본 나를 스토커로 착각한 사람이 고소한 건가? 그럴 순 없지. 난 모자도 안 썼고 길은 좁고 나도 그 길 밖엔 없었는데. 심지어 골목을 나오자마자 반대 방향으로 갔는데.

아 뭐지. 대학 다닐 때 리포트 대필 해 주던 게 걸린 건가? 이게 저작권 시비가 붙은 건가? 에이 그건 너무 갔지. 그래봤자 교양 과제일 뿐인데.

아 설마. 고등학생 때 급식신청 안 하고 몰래 저녁 먹은 거? 그렇게 쪼잔하게 그러겠어. 뭐 나만 그랬나 그리고.

아 에이. 중학교 때? 돼지라고 놀렸던 그 여자애가? 이제 와서? 내가 뭐 연예인이 된 것도 아닌데? 얘가 검사가 됐나?

더 잘못한 게 있나?


결국 네이버에 '법원등기 내용 확인 방법'을 검색했다. 인터넷 조회를 해 보니 어떤 등기도 없었다. 텅 빈 하얀 화면만 나를 비췄다.

하다 하다 무슨 죄가 더 강렬했는지 등급을 매겨 보다니. 분명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걸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내가 생각한 등급을 다른 사람은 인정할 수 있을까.


법이 무서워서 죄가 떠오르는 건지, 죄가 생각나서 법이 무서운 건지 도통 감이 오질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나쁜 놈은 목소리로 낚시질을 하는 저 놈들이란 것인데, 왜 내가 더 나쁜 인간으로 보이는 걸까. 그래도 난 저들보단 떳떳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내 착각이었을까. 일단 난 미끼를 물지 않았으니 '다행'으로 덮어두자.


그래봤자 죄책감은 경쟁되지 않는다.

왜냐면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죄는 이렇게 쉽게 뱉고 적을 수 없으니까.


어디 깊숙한 곳에서 서로 엉켜있어야 들키지 않을 테다.

소름 돋는 건 아무리 깊어도 그것들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우리들이다.


아 이제. 지워야겠다, 검색창에 저장된 검색목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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