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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바지와 긴팔

초청4

by 다날


긴팔을 입기엔 덮고 반팔을 입기엔 쌀쌀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름과 가을을 합쳤다. 반바지에 긴팔을 입는다. 여름과 가을도 우리가 같은 생각일까.


24를 4로 나누면 6으로 떨어진다. 봄, 여름, 가을, 겨울도 각각 여섯 개의 절기를 누린다. 아니 누렸다.


가을 옷을 꺼내려 옷장을 오랜만에 뒤적거렸다. 이상하게 반팔과 반바지를 쉽게 하부장에 넣지 못했다. 왠지 필요해 보였다. 서랍 칸의 경계가 무의미해졌다.


단지 인간이 자연을 괴롭혀서 환경 문제에 열을 올리자는 뉴스가 아니다. 이렇게 가다간 지구가 녹아내릴 테니 우리 모두 긴장하자는 경고도 아니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계절이 서로 경쟁하는 느낌이 드는 게 묘할 뿐이다.


여름이 가을을 쉽게 침범했다. 그런데 겨울마저 가을을 탐낸다. 마치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꼴이다. 이상하다. 고래와 새우는 애당초 체급이 다르니 새우에겐 안타깝지만 고래가 바다를 더 넓게 헤엄치는 게 납득이 된다.

처음부터 공평하게 같은 시간을 가졌던 가을은 왜 자신의 자유를 버리게 됐을까. 분명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하진 않았을 테다.


그렇다면 여름과 겨울이 가을을 뺏고 싶었을까? 그 또한 아닐 테다. 우리도 그렇지만 더우면서 추운 애매한 것들을 세상은 좋아하지 않는다. 평범한 것과는 다르다. 원래 권리를 늘리면 그만큼 의무도 따라오기에 구태여 여름이 차가움을 담당할 필요는 없다. 겨울 또한 같다. 어렵게 내린 눈을 쉽게 녹인다면 겨울은 자신의 자유를 내려놓는 것이다.


반바지와 긴팔, 이 옷장에 힌트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힌트는 언제나 한정되어 있고, 쉽게 얻을 수 없다. 또한 힌트는 어디까지나 조력자이지 해결사가 아니다.

옷장은 답을 알지만 계절에게 필사적으로 숨긴다. 그래서 가을은 증오의 대상이 없는 증오를 품는다. 누가 자신의 것을 앗아가지만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결국 증오의 대상을 스스로 만들게 된다. 아마도 여름과 겨울이 될 테다. 그럼 여름과 겨울은 자연스레 가을에 반기를 들 수밖에 없다. 서로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서로를 혐오하고 미워하며, 한쪽이 무너질 때까지 때린다.

사실 생각해 보면 계절처럼 반바지와 긴팔은 서로 경쟁하는 라이벌이 아니다. 충분히 어울릴 수 있다. 다만 지금은 융합이 아닌 냉전으로 공존한다.


어떻게 이렇게 자신할 수 있냐고?


옷장의 주인은 우리 인간이니까. 나도 인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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