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청15
싱싱할 때 뒤집어 말려야 에뻐.
그렇다는데, 내가 그래도 될까? 이제 막 보라색 튤립 한 송이가 입을 벌리려는데 차마 물에서 빼내지 못하겠더라. 물론 옹기종기 다발에 쌓인 모습이 예뻐 오랫동안 두고두고 바라보고 싶다. 꽃이란 게 어차피 나보다 빠르게 시드는 것인데, 그래서 흔하디 흔해 어느 꽃집에서나 흩날리는 중일 텐데, 무엇보다 너는 고통이 없잖아, 있어도 없다 해서 다른 누구 하나 마음 아프지 않잖아, 꽃잎을 쓰다듬어 주며 살인자가 되려 한다.
줄기들을 모여 잡고 물주머니에서 꺼내려는데 어찌나 가볍던지, 놀라 내 손을 펼쳤다. 지구의 모든 만물은 중력에 의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자연법칙이 하찮아 보였다. 슬쩍 만져도 깨달을 수 있는 세상의 기본을 뭐가 두려워 주저리주저리 떠들기만 했는지, 코끝에서 웃음이 샜다.
지금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있는 내가 괜히 초라해지더라. 나는 뉴턴도 아인슈타인도 아니라 무슨 원리로 세상이 계산되는지는 모르지만, 지구가 공이라면 위가 어디 있고 아래가 어디 있겠냐 다시 한번 줄기들을 잡지만, 그럴수록 공허한 죄책감만 커졌다. 바람 빠진 공을 운동장 구석 어딘가에 버리고 떠나던 마음이 몰래 꽃잎에 앉았다. 끝내 그 공이 운동장 위쪽인지 아래쪽인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꽃다발을 다시 놓고 물구나무를 섰다. 처음엔 피가 머리로 쏠리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질 수 없는 것들의 꿈을 이뤄주는 듯싶어 꽃을 거꾸로 쳐다봤다. 내가 먼저 뒤집혀 봤는데, 세상을 거꾸로 돌렸는데, 생각보다 여유롭더라. 빼곡하고 복잡한 땅이 아니라 하늘을 걸어가는 건 신나고 자유로운 일 같더라. 어쩌면 세상은 원래부터 이 방향이 맞았던 게 아닐까, 그래서 넌 뒤집어질 때 비로소 내내 어여쁘니, 이상도 너를 보며 <이런 시>를 적었을까.
찰나였다. 딱 시의 한 구절 정도만 생각할 수 있었다.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하더니 내가 짚고 있는 쪽이 땅인지 하늘인지는 전혀 고민할 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래, <이런 시>의 마지막도 이랬지. 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시는 그만 찢어버리고 싶어 했지. 꽃아,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말아라. 네 목숨은 내게 있으니 말이다. 그게 아니면, 혹시 아름다울 때 죽고 싶다는 일종의 신념을 말하는 중인 거니, 꽃잎이 말라비틀어져 찢겨야 내내 어여쁠 수 있단 걸 알고 있는 거니. 그것도 아니라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 너도 알고 있는 거니?
피가 다시 온몸으로 퍼진다. 살인자가 되기 싫다. 살인의 요건은 까다롭지만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아니면 피할 수 있을 듯싶었다. 직접 목을 졸라 숨통을 끊는 흔적을 내 손에 묻히고 싶지 않았다. 평소에 착하게 살았다고 한 톨의 부끄러움 없이 하늘에 외칠 입장은 아니었지만, 가장 잔인한 일로부턴 최선을 다해 도망가고 싶더라.
꽃을 버렸다. 다발 채로 빌라 앞 쓰레기 통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쉽게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차가운 바람을 견딜 수 있을까, 누가 저 위에 쓰레기를 던지진 않을까 싶다가도 비둘기 한 마리가 다가오는 소리에 문득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죽일 마음이었잖아, 죽으라고 내놨는데 죽을까 봐 걱정하는 건 무슨 모순이니.
비둘기가 꽃 앞의 쓰레기를 마구 쪼아댔다. 다음 차례는 꽃처럼 보였다. 쪼이면 아프겠지, 이곳저곳 온몸을 순서 없이 찔러대면 고통 속에 죽겠지, 다시 꽃다발을 들었다. 내 손으로 죽이는 것보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죽어가는 비명을 듣는 게 더 잔인한 잔상 같았다.
힘을 주지 않아도 꽃은 내 손에 머무르더라.
중력, 그것 때문이겠지. 만물은 중력을 사랑하기로 처음부터 작정했는지 싶었다.
건너편 빌라의 화단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 중력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모두 흙으로부터 와 흙으로 가는 본능을 저버릴 수 없는 게 아닐까 싶더라. 정수리 처박아 딱딱한 흙을 뚫고 올라와, 밟고 뛰놀다 가끔 그 위에 눈물을 떨어뜨리며 흙을 부드럽게 만들고, 결국 서서히 흙의 숨구멍 크기만큼 쪼개져 그곳에 스며든다.
꽃을 화단에 내려놓았더니 풍경이 낯설었다. 수채화 그림에 찍힌 기름방울처럼 이질적이다. 분명 저들도 순수한 들꽃이나 야생화는 아닌데도 내 꽃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동시에 행복하게 흔들렸다. 이 그림을 보지 않았어도 나는 알았다. 모든 꽃의 고향은 흙이기에 이곳에서 가장 편안하고, 언제나 이곳으로 회귀하고 싶어 하는 사실을. 열망이 가득한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다시 꽃을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이해가 되면서 이해가 되지 않아 괴로웠다. 사랑한다면, 무엇이 아름답고 또 무엇이 사랑하는 방법인지 안다. 꽃을 흙에 놔두고 왔어야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이 꽃을 볼 수 없게 된다. 감기라도 걸리지 않을까, 역시 따뜻한 공기가 그에겐 더 필요하다, 내가 꽃이 아니니 꽃이 정말 바라는 게 흙이 맞을까,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이리저리 두리번거리지만, 답은 알고 있다. 비록 짧아져도, 꽃은 꽃으로 남고 싶겠지 장식품이 아니라, 뿌리로 땅을 밟고 싶겠지 머리가 아니라.
지긋이 튤립에 코를 맞추니 하얀 바람이 불어왔다.
비둘기가 쪼아대어 산산조각 나고, 어떤 꽃잎은 비둘기 뱃속으로 들어간다. 한 바퀴 구경을 하더니 똥에 기대어 다시 흙을 밟는다. 흙의 숨구멍을 미끄럼틀 타듯 부드럽게 훑으며 땅 속으로 파고든다. 피곤했는지 한숨 잠을 자고 일어난다. 뻐근하고 근질근질한 몸을 마구 움직이니 키가 커진다. 팔과 다리도 갑자기 많아진다. 이제 이 어두컴컴한 방은 너무 작다. 숨이 막힌다. 올라가자. 올라가자.
처음엔 돌연 눈을 감는다. 무서운 건 줄 알았는데 몸이 따뜻해지는 게 기분이 좋아진다. 눈을 뜬다. 해가 뜬다. 마음껏 움직여도 어디 하나 부딪히지 않고 팔랑거린다. 모든 빛이 그의 몸짓으로 세상을 넘실거린다. 하얀 국화가 한 송이 피어오른다.
아야! 꽈지직 찢겨나가는 게 고통스러워 정신을 잃는다. 다시 눈을 뜬 곳은 흙이 아니다. 몸의 절반이 물에 잠겨있다. 태양은 없는데 몸은 저번보다 따뜻하다. 아니 뜨겁다. 향이 이상하다. 악취는 아닌데 나무가 번개에 벼락을 맞았을 때 타는 냄새와 비슷하다. 하지만 농도는 다르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사랑이 타들어 간다. 짙다.
누군가 하얀 국화를 들어 향초 옆에 놓는다. 아무 말 없이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눈물 한 방울이 턱 끝에서 떨어진다. 건조했는지 갈라진 몸 마디마디에 비가 온다. 시원하다. 비구름이 마지막으로 훑고 지나가는 자리는 국화의 꽃잎이다. 국화는 품었었던 무지개를 뿜는다. 모든 빛이 다시 출렁거리며 사방이 하얘진다. 국화는 다시 기다린다. 다음에 밟게 될 흙으로부터 자신이 무슨 색으로 휘날릴지 꿈꾸며.
싱싱할 때, 어여쁠 때 많이 보자. 그게 예뻐.
그럼 그 꽃은 내내 어여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