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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규원 Apr 23. 2023

인생의 빛과 그림자

<빛 혹은 그림자> 로런스 블록 외, 문학동네(2017)

 

우연한 만남이 있다. 좋은 사람을 만나거나 좋은 책을 만나는 행운 말이다. 가끔 도서관에서 뜻밖의 책을

만나게 될 때 마음이 설렌다. 몇 해 전 책을 찾다가 호퍼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쓴 소설집을 만났다. 호퍼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가장 미국적인 풍경과 인물을 표현하고 강렬한 명암의 대비로 시선을

잡아끄는 작품들을 남겼다. 먼저 그림을 펼쳐 보았다. 이 그림과 이야기가 어떻게 만나게 될지 정말 궁금

했다. 과연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까?


화가는 뭔가 의도가 있어서 그렸고,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림 속에서 이야기를 읽어내려 한다. 호퍼가

보여준 한순간과 평범해 보이지 않는 일상은 멜랑꼴리를 자극하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의 조건에 관한 의미 있는

진술들처럼 보이는데 작가들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상상의 세계로 저마다 자유롭게 해석했다.

그가 드라마 속 장면처럼 그린 그림과 마찬가지로 때론 긴박하게 때론 가슴을 저미게 만들었다. 마치 그림과 함께 실제 상황 속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호퍼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밤샘하는 사람들(Nighthawks)'은 늦은 밤 뉴욕 그리니치 아비치의 한

심야 식당이 배경이다. 그는 창가에서 바깥을 보고 밤의 불빛 아래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기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이 책에 실린 몇몇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가 표현한 고독한 인물들의 주위에는 뭔가

욕망을 억누르는 듯 긴장감이 흐른다. 가장 화려하고 활기찬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메마른 감정이 이 그림에 특히 잘 나타나 있다.


LA 경찰을 그만두고 사설탐정이 된 보슈는 의뢰인의 딸을 찾는 임무를 맡았다. 그녀는 돈과 권력을 쥔

아버지로부터 당한 일 때문에 피해서 숨어 버린 지 8년째다. 그가 미행하던 그녀를 만난 곳은 박물관의

호퍼 상설 전시실이다. 화가가 밤의 어둠 속에서 왜 그 광경을 그리기로 했는지 그림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소설의 영감을 얻기 위해 앉아 있던 그녀가 말을 걸어온다. 시카고의 차가운 날씨 때문에 얼어

붙었던 그의 모습과 이틀이나 내리 전시실에 온 것이 들켜버렸다. 작가에게 예리한 관찰력은 필수조건이

아닌가. 그녀는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커플보다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하면서 보슈는

어느 쪽이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의 판단대로 딸의 입장을 이해하고 도와주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그 그림을 떠올린다. 생각에 대한 자기 생각을 하는 사람? 그림을 보면서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이

일치했었던 것이다.      

'음악의 방’을 쓴 스티븐 킹은 <뉴욕의 방>이라는 호퍼의 작품이 말을 걸어왔다고 한다. 모든 예술과 문학

작품은 ‘말 걸기’라고 한 장영희 교수의 글이 생각났다. 작품을 읽거나 마주하게 될 때 어느 순간 우리 마음이 열리고 대화를 나누게 된다는 것. 나는 책에 실린 그림을 보자 벽 색깔이 거슬렸다. 아마 붉은 색감을

살리려는 의도 때문인지 원화의 황토색 실내가 연두색으로 바뀌어 버렸다. 도판을 실을 땐 원화와 다른

이미지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창문이 활짝 열린 방에 신문을 읽는 남자와 주홍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밤인데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듯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

뒤쪽 벽장에서 ‘쿵’ 소리가 한 번씩 들릴 뿐이다.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부부의 일상 뒤에 잔혹한 음모와 폭력이 숨겨져 있다. 대공황기 침체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둘 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살아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못 되는 앤 더버 부부의 작은 갈등도 있고.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그림인 '푸른 저녁(1914)'은 옆으로 긴 작품인데 안타깝게 도면이 양쪽으로 잘린 채 실렸다. 소설에서 오른쪽 테이블에 솔랑주와 마주 앉은 르클레르 대령의 단장한 모습이 없다. 나는 호퍼의 도록을 꺼내어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소설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이 그림의 배경이 실내가 아니라

베란다이고 프러시안블루 빛깔의 황혼이 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앙에 앉은 베레모를 쓴 사람은 화가로

보이고 맞은편 피에로는 대머리에 아연 백색으로 칠한 얼굴을 하고 있다.

정성 들여 분장을 했다기보다 작가의 표현대로 마치 어린아이가 들라크루아의 팔레트를 사용한 것처럼

지나치게 큰 입술과 아치 모양의 눈썹, 주홍색 눈물이 괴로운 광대의 초상으로 그려졌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로버트 올렌 버틀러는 뭔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어릿광대의 이 섬뜩한 모습이 사건을 일으킬 것

같은 예감으로 포착했다. 과연 광대가 좋아서 웃는 것일까? 내면에 배신당한 슬픔을 안고 있어서 곧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순간이지만 처연하게 웃음을 짓는 것이다. 남을 웃기기 위해 애쓰면서 자신은 울 수밖에

없는 삶을 사는 개그맨의 비애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피에로처럼 눈물과 웃음이 섞인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나도 해 본 적이 있다. 정말 괴로운 순간인데, 나도

모르게 연기를 하고 있는 광대가 되어버렸다. 부당한 일을 당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감정을 숨겨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으로서 품위를 잃고 싶지 않았다.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과 자신들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서로 아는 상황이었다. 그 처절한 경험이 이 그림을 잊지 못하게 한다. 세상에는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서 그렇지 겉으로 웃고 있어도 속으로 울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을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광대는 대화를 주고받다가 환하고 커다란 미소를 짓고 주인공은 광대 대신 억지웃음을

웃게 된다. 이 아이러니가 정말 극적이다! 소설에서 이 아이러니는 삶을 이해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이용되고 있다. 어려서 주인공이 겪었던 두려운 사건과 매료되었던 인물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극적인

결말로 치닫고 만다. 신비롭고 불길하게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라 한 편의 영화처럼 생생하다.


'뉴욕 영화'는 극장이라는 한 공간 안에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편안하게 좌석에 앉은 사람들과 한쪽에 서 있는 금발의 젊은 좌석 안내원 아가씨의 대비가 뚜렷하다, 중편 수록작인 ‘영사 기사’는 마치

누아르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단순한 불량배가 아니라 기꺼이 잔인해질 수 있는 패거리들이 상납을 요구하며 극장주를 협박한다. 선의를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젊은 영사기사도 알았다. 수호천사처럼 자신을 돌보아 주고 일자리를 넘겨주었던 버트는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라고 말하곤 했으니까. 버트는 왕년에 한가락했던 사람이다. 뭔가 악의 싹을 자르지 않으면 더 큰 화를 불러올 것이 뻔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경찰도 한통속이니 안전한 삶을 기대할 수 없다. 좌석 안내원에 대한 호감에서 출발하긴 했지만 영사기사는 자신의 삶을 지켜야 할 책임을 지기 위해 버트와 함께 행동에 나섰다. 상황이 잘 마무리된 후 그녀는 떠났고 그의 삶은 계속된다. 쿨하고 매력적인 이 이야기는 멈출 수 없이 빠져들어

누구든 단숨에 읽게 될 것이다.


가장 놀라운 이야기는 <사우스 트루로 교회>를 소재로 한 ‘직업인의 자세’였다. 뉴욕시티 워싱턴 스퀘어

인근에 스튜디오가 있던 호퍼는 여름이면 뉴잉글랜드 케이프 코드 맨 끝 사우스 트루로 별장으로 갔다.

거기서 주변 풍경들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적당히 분산된 햇살에 의해 색채나 명암의 강한 대비가 없어서 자연스럽기도 하고 조금 밋밋하기도 하다. 아무것도 없이 솟아있는 교회는 삭막한 풍경으로 세상과 동떨어져 보인다. 차갑고 고요한 것은 날씨만 그런 게 아니었다. 대를 이어 교회를 지킨 장로교 목사 제퍼슨도 늙고 병들어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는 아내도 하나뿐인 딸도 없고 70년 지기 친구 빌리가 있다.

두 사람은 비웃음이나 수치심에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들의 실패에 대해서도 털어놓는 사이가 된다. 마침내 제퍼슨은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비밀과 속마음을 이야기한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어느 소작농에게서 산 입양아였고 무신론자였다. 십 년 전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면서도 천당에서 다시 만나리라는 기대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텅 비어버린 모습으로 거의 똑같았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 한때는 믿었지만 북대서양 참고래가 계속 해안에 투신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게 다 동화 같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반면 신앙심이 돈독한 빌리는 자신이 믿지도 않는 신에 대해 설교를 하는 이유가 뭔지 묻는다. 그의 대답은 너무나 충격적이다. 그는 솔직하게 가업을 운영한 셈이라고 고백한다. 마을에서 존경받는 목사로서 고객들의 즐거움과 위안을 위해 주어진 역할을 해 온 배우일 뿐이었다고. 그의 고백이 신 앞에 진실할지라도 평신도인 빌리에게는 심히 거북하다. 빌리는 거의 초인적인 낙천성과 부정의 능력을 발휘하여 제퍼슨에게 퍼진 암과 같이 피운 마리화나 꽃의 강력한 효력 탓으로 돌린다. 신앙의 미덕이고 병폐이기도 한 모습이다.

빌리는 전 부인이 수놓은 액자를 떠올린다.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은 바다를 컵에 담으려 애쓰는 것과 같다.(성 어거스틴)”. 참으로 이 대목에서 적절히 역할을 해주는 경구라서 반가웠다. 인간이 신을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는 사건, 영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간절히 그것을 바란다고 해서 이루어질까? 가까이 느낄 때 인격적이지만 동시에

절대 타자로서 초월적인 신에 대해 고뇌하면서 제퍼슨도 평생 신을 찾으며 기도했으리라.  


호퍼는 카페나 레스토랑의 북적이는 모습을 그리기도 했지만 '자동판매기 식당'처럼 대체로 고요한 분위기이다. 이 그림은 특히 창밖의 어둠을 배경으로 혼자 떨어져 앉은 여성의 갈망과 내적 응시를 강조했다. 녹색 외투에 노란 모자를 쓴 아름다운 여성이 커피 잔을 잡고 단정하게 앉아있다. 잘 차려입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림 제목이 ‘자동판매기 식당’인지 의아했는데 소설을 읽으니 와닿는 점이 있었다. 애플

크리스프를 디저트로 먹고 싶다는 생각과 주머니 사정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데 죽은 엘프 리드의 목소리가 들린다.

"당신 지금 꾸물거리고 있어. 크누델마우스. 당신을 유혹하는 건 단맛의 쾌락이 아니야. 당신이 두려워하는 일을 미루고 싶은 욕 망이지.”

남루한 삶이지만 고상한 리프 헨 은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스푼들과 포크, 버터나이프를 깨끗이 닦아 핸드백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여유 있게 걸어 나오다가 매니저에게 붙들린다. 경찰 앞에서 핸드백을 열어야 하는 상황이 반전이다. 그녀는 그것들이 어머니의 물건이라는 것을 내보이고 쏟아져 나오는 사과의 말들과 함께 당당히 보상을 요구하고 나선다. 이런 식으로 그녀는 또 얼마간 버틸 돈을

챙긴다.


호퍼의 그림들처럼 소설들은 인생의 빛 혹은 그림자를 그리고 있다. 책을 읽으며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과학에서 빛이 파동도 되고 입자도 된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듯이. 한 가지 사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사의 양면도 볼 줄 알아야 한다. 더 생각해 보지도

않는 선입관과 편향,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추종하는 피상적인 인식은 벗어던져야겠다. 소설을 통해 들여다보게 된 인간의 밑바닥은 어둡다. 배신, 시기, 강간, 폭력, 살인과 같은 악행에서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숨겨진 이면을 보아야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소설들은 짧지만 그림처럼 강렬하다. 그림은 다 표현할 수 없는 말과 이야기들을 담아낸다. <인간과 말>에서 “말이 없었다면 그림도 없었을 것이다.”

라고 막스 피카르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나도 화가이기에 백 번 공감한다.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서 그 어떤 미술평론보다 이야기가 그림의 이해를 훨씬 높이어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대적 배경 때문은 아닐 것이다. 행복하고 순수한 삶을 만들어 나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런 냉정한

현실 인식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디에도 아름다움은 있는 법. 그것은 선하고

진실하지만 어둠과 그림자도 있다. 호퍼는 이 모든 것을 빛으로 감싸는 그림을 그렸다.

호퍼의 그림은 책 표지에도 잘 실렸고 인기가 많은 편인데 엊그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해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호퍼의 작품과 아카이브를 갖춘 뉴욕 휘트니미술관과의 협업 전시로 작가 자신이 좋아하는

'이층에서 내리는 햇빛(1960)'을 비롯해서 주요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품들은 시카고

미술관에 았어서 이번엔 볼 수 없다. 빛이 만들어 놓은 공간과 상념에 잠긴 인물이 사실주의적이면서  

상징주의적으로 재현된 그림을 보면 어느새 이야기가 샘솟게 될 것이다. 어디엔가 있지만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는 삶의 장면들, 그의 내면세계를 만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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