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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규원 Jul 21. 2023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 에르노, <집착>

     

작가가 자신을 먹잇감이자 관객으로 삼았던 질투에 휘둘려 지내는 동안 탐욕스럽고 고통스러운  

내면의 말들을 기록한 책이다. 사랑하던 사람에게 애인이 생겨서 나를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소재인데 작가는 여과 없이 지극히 사적인

글쓰기로 내밀한 부분까지 드러낸다. 나는 결코 경험해 볼 수 없던 질투가 꾸며내는 온갖 상상과

행동들을 묘사하고 고통을 노출한 일기장을 집어 들고 단숨에 읽게 되었다.


'언젠가 그들은 나의 체험을 제 것으로 삼게 되리라. 여기에 기록되는 것은 더 이상 나의 욕망,

나의 질투가 아니라 그저 욕망, 그저 질투이며,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곳에서 작업한다.'


다시는 그를 보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상실감과 질투가 끝난 것이 아니다. 진실은 '나는 그를

다시 소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의 빛바래가던 감정이 애초의 생생한 색깔을 되찾으며

‘그’를 향한 눈먼 욕망이 날뛰기 시작한다. 동시에 연인의 상대를 알아내려 하면서 자신의 존재

전체가 평가절하되는 느낌을 받는다. 질투심에 사로잡혀사 자기 삶을 제어할 수 없는 순간들을

겪은 작가의 이야기가 내 감정인 양 긴장감 있게 다가온다. 여성의 성적 욕망을 그대로 표현한

부분은 당혹스러울 만큼 직접적이라서 놀랐다.


그녀는 삼십 대 남자가 마흔일곱 살의 여자를 기꺼이 택했다는 사실이 용납하기 힘들었다. 자신이

유일무이한 존재였던 것이 아니라 경제적 독립, 안정된 생활, 모성적 태도와 성적 다감함으로

특징지어지기 마련인 완숙한 여인을 사랑했을 뿐이라는 명백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대량 생산되어 대체될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했다. 이 논리를 거꾸로 뒤집어서, 그의

젊음이 가져다주는 이점들이 그에 대한 나의 집착에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인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성찰을 할 의욕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애인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은 온갖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고심할 거리들로 삶을 채워 버렸다. 집착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조금이라도 지체 없이 어떤 일을 행해야 한다는 광기에 가까워진다. 그러다가 자신이 쾌락을 왜

그토록 얻고 싶어 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그와 허물없이 함께 지내던 시간과 일상들이

가져온 행복이 이제 커다란 고통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를 그녀에게 단단히 결합시켜 주었던 욕망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깨닫는다. 신경이 쓰이고

불행해질 각오까지 하면서도 곁에 묶어두고 남자를 데려다가 부양하길 고집하는 부류의 여자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사로잡힌 상태를 그녀는 끝장내기로 한다. 더 이상 자신을 혼란에 빠뜨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의 인격이 위엄을 되찾게 되어 다행이다.


‘더 이상 널 보고 싶지 않아. 뭐 별문제는 아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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