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쓰고 있는 휴대 전화는 갤럭시S21이다. 연보라색 바디에 후면에는 세 개의 카메라 렌즈가 신호등처럼 붙어 있다. 몇년 전 사용하던 휴대 전화가 고장이 나면서 사게 된 중고 제품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새 휴대 전화를 사지 않는다. 자원의 재활용이라든가, 지구 환경 보호라든가 하는 멋지고, 거창한 명목을 갖다 붙이고 싶지만 순전히 돈 때문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이유도 없다. 80만원이 넘는 겨울 코트는 할부로라도 사면서 어째서인지 휴대 전화 한 대에 백만원을 넘게 주는 것은 매우 아깝다.
어쨌든 내가 생각한 적절 가격(대략 25만원에서 30만원 선이다.)에 맞추다 보면 취향이란 부분은 집안의 천덕꾸러기처럼 가장 마지막에 고려하는 부분이 된다. 가격과 휴대 전화 상태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다 보면 디자인나 색깔 상관없이 재고가 남은 물건을 사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볼 때마다 눈에 거슬리냐하면 그건 아니다. 볼 때마다 마음에 쏙 들지는 않지만, 크게 눈에 거슬리지도 않는다. 이상하게도 휴대전화만큼은 그렇다. 손에 들린게 갤럭시 S21이건 아이폰 최신 기종이건 크게 상관없다.
나는 평일에는 퇴근 후 2시간 정도, 주말에는 4~5시간 가량(자신에게 솔직해 지길!!!!) 휴대폰을 하면서 보낸다. 주로 하는 것은 유튜브 보기다. 최근에는 쓰레드에서 다른 사람들이 올린 글을 읽기도 하고 인스타로 릴스를 보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이 어디로 새고 있는지도 모르게 휴대 전화에 쏙 빠져 있다 보면 첫째가 학원을 마치고 돌아온다. 그제서야 내 정신은 손바닥만한 세상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온다. 주린자를 먹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시험 준비 때문에 늦게 오는 날이면 나는 손바닥만한 세상에 푹 파묻혀 헤어날 줄 모른다.
그 곳은 좁지만 아늑하다. 세상의 소란스러움과 고민이 방문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곳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 세상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소란스러움과 고민과 번잡함이 늘 뒤따른다. 하지만 그 작은 세상은 멸균실처럼 고요하고 조용하다. 내 안의 소란도 그곳만큼은 출입할 수 없다.
어린시절 나는 잘 울고 쉽게 삐지는 아이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우리집의 천덕꾸러기였다. 아들 손자만을 원했던 할머니에게는 고추를 달고 나오지 못한 천덕 꾸러기, 시집살이와 맞벌이에 지친 엄마에게는 자꾸 자신을 봐달라고 채근하는 천덕 꾸러기. 나는 서러운 것이 많은 아이였다. 낮동안은 오빠를 중심으로 집안이 돌아갔고 저녁 늦게 퇴근을 한 엄마는 나에게는 관심 가질 틈이 없었다. 아빠가 우는 나를 업어주고, 내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줬지만 그는 늙은 부모를 모시는 마음 여린 가장이었다. 퇴근하면 내가 아니어도 신경써야 할 일이 수십가지였다.
내 안의 소란스러움을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문을 열고 그 곳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내 작은 몸에 딱 맞는 공간이 있었다. 솜이 들어간 이불은 너무 푹신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았다. 딱 일곱살 내 무게를 견딜만큼 아늑했다. 아무도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곳, 위험하지 않으면서 바깥 세상과 단절된 곳. 그곳은 바로 장농 안이었다.
다른 누군가 들어올 수 없는 공간, 세상의 소란스러움과 단절된 공간이 내게는 필요했던 것 같다. 퇴근하자마자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는 마음도 같다. 세상과 단절될 물리적인 공간을 찾지 못한 나는 스마트폰 속으로 숨는다. 하지만 이 곳은 좀 위험하다. 장농 안에 있으면 배도 고프고, 화장실도 가고 싶다. 서러운 마음이 좀 잦아들면 심심하고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좀처럼 심심하거나 무섭지 않다. 재미있는 볼거리와 새로운 자극들이 넘쳐난다. 여기도 들리고 저기도 들리고 하다보면 나중에는 나가는 길을 잃어버릴 것 같다. 애써 찾은 나를 잃어버리게 될까봐 두렵다. 아무래도 장농 한 구석을 비워 내 마음이 잠시 쉴 공간을 다시 만들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