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뉴발란스 530

by 봄동



나는 물건을 오래 쓰지 못한다. 새롭고 감각적인 물건들이 팝콘 터져나오듯 쏟아지는 세상에서 한가지 물건에 정을 붙이고 오래 쓴다는 것은 뭔가 억울했다. 특히 옷이 그랬다. 금세 싫증이 났다. 배송을 기다릴 때는 가슴이 설렜다가 받아보면 묘하게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있었다. 색상이나 전체적인 핏이 다르다거나 천이 너무 무겁거나 가벼웠다. 마치 젊은 날의 어설펐던 풋사랑처럼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대청소를 빙자하여 수많은 풋사랑들을 종이 박스에 실어 떠나보냈다. 내 풋사랑들은 무게로 값어치가 환산되었고 내 손에는 겨우 아이스 카페라테 한 잔 사먹을 돈이 쥐어졌다. 치킨도 아니고 말이다. 최초 투자 바용의 1%도 회수하지 못한 셈이다. 몇 번의 값싼 이별을 겪고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니멀 라이프에 빠져있던 내게 유튜브 알고리즘이 브이로그 한 편을 추천해줬다. 40대직장인 여성의 브이로그였는데 감각적이지만 심플한 삶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 날 내가 본 것은 그녀의 옷장이었다. 패딩 듀 벌, 코트 한 벌, 바지 세 벌, 니트 세벌. 소박한 옷장이었지만, 감히 소박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패딩은 무려 몽클레어와 버버리였고, 나머지 옷들도 꽤나 고가의 브랜드 옷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차분하고 우아한 목소리로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옷을 잘 손질해 입는게 미니멀한 옷장이라고 생각한다며 브이로그를 끝맺었다.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저거다 싶었다. 저게 바로 취향이라는 거지.

곧바로 풋사랑들을 떠난 보낸 헛헛한 내 옷장을 채울 아이템들을 메모지에 써내려갔다. 그러다 잠깐! 이러다 이번 달은 쫄쫄 굶겠는데? 그녀는 황새, 나는 뱁새였다.(그것이 재력인지 피지컬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나는 말할 수 없다.) 계획 수정이 필요했다. 그렇게 타협해서 산게 아울렛에서 산 마인 패딩이다. 짙은 베이지 색이 파워 웜톤인 내 피부색과 잘 어울렸고 세로줄 누빔이 날씬해보이고 따뜻했다. 당당하게 3개월 카드 할부로 값을 치뤘다. 그래도 나는 돈 버는 여자니까.

막상 비싼값을 치르고 산 패딩이지만 잘 안 입어졌다. 떠나간 내 풋사랑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잘 만들어지고 몸값도 비쌌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손이 가지 않았다. 입을 때마다 풋사랑들과의 안좋은 기억이 재현되는 느낌이었다. 이상은 아름답고 주름 한 점 없이 깔끔하지만, 현실은 그저 현실이다.

신발 역시 제 버릇 개 주지 못하는 품목들 중 하나였다. 그즈음 우리나라 패션계에는 가히 혁명이라 할 수 있는 트렌드가 불어닥쳤는데 그건 정장이나 치마에도 운동화를 매치해서 신는 것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정장이나 치마에는 무조건 구두였다. 배우 류승범이 아이보리색 슈트 아래에 운동화를 신고 시상식장에 나타났을 때는 다들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그게 트렌드가 된 것이다. 마침 무릎 통증도 있겠다, 낡은 구두를 싹 정리하고 20여년 만에 운동화를 사서 신었다.

처음은 스케쳐스와 나이키였다. 스케쳐스는 투박했고, 나이키는 발볼이 넓은 내게는 불편했다. 베스트셀러라는 에어포스원은 걸을 때마다 신발 밑창의 무게가 느껴졌다. 아디다스 러닝화는 편해서 운동할 때는 딱이었지만 치마나 정장바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게 돌고 돌아 만난 것이 뉴발란스 530이다.

뉴발란스 530은 원래도 뉴발란스의 스테디셀러 모델이었는데 방송인 김나영씨가 스틸 그레이 색상을 신고 유튜브에 출연하면서 다시 화제가 됐다. 국내에서는 구하기 힘들어서 미국 직구 사이트에서 샀다. 사고 보니 다들 왜 그리 난리였는지 알 것 같았다. 러닝화라 일단 발이 편했다. 게다가 이 신발의 진정한 장점은 어떤 옷이든 어울린다는 거였다. 꽃무늬 원피스도, 버뮤다 팬츠와도, 통넓은 검정 정장 바지와도 찰떡같이 어울렸다. 나는 뉴발란스 530을 신고 집 앞 도서관도 가고, 출근을 했으며, 산책도 갔다. 그러다 보니 다른 신발들은 자연스레 안신게 되어 겨울용 운동화 하나를 남기고 정리를 했다.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530의 유일한 단점은 너무 흔하다는 것이다. 신고 나가면 어, 나도 이 운동화 있는데 하는 소리를 여러 번 듣는다. 심지어는 옷가게 탈의실에서 나란히 놓인 같은 크기의 530 운동화 두 켤레를 보고 쓴 웃음을 지은 적도 있다.

하지만 하늘 아래 같은 사람이 없듯 하늘 아래 같은 530은 없다. 나의 뉴발란스 530은 나만의 530이다. 3년간 나와 함께 하면서 내 발 모양에 맞게 변형되고 그에 맞게 자리를 잡았다. 신발 밑창은 내 걸음걸이에 맞게 적당히 닳았다. 530은 어떤 날은 설레서 발걸음이 붕뜬 나와, 또 어떤 날은 우울감으로 습해진 나와 함께 걸었다. 우리가 함께 한 걸음은 나에게 고요한 위로였다.

올해 내게는 새로운 운동화가 헌 켤레 생겼다. 원래 있던 겨울용 운동화가 낡아서 정리를 하고 새로 산 신발이다. 하지만 아직 내 손이 제일 많이 가는 운동화는 530이다. 이 신발 만큼 내게 어울리는 신발은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리도 헤어질 날이 올 것이다. 대단한 방식의 이별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다만 신발이었으므로. 하지만 그는 정말 내 마음에 드는 신발이었고, 그 어떤 순간에도 실망한 적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