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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이에 마지막 검암역 다리는 더 실체를 띠게 되어 더 뜨거워지고, 더 흔들리고, 더 멀어졌다. 처음 만났던 검암역 다리가 우리를 어떤 악재로 데려다 놨는지, 음유시인이 율격을 지킬 때 차곡차곡 모이다가 때가 되어 뱉은 가래에 불과했던 악재가 삶의 행동영역에 들어서자마자 얼마나 말끔한 차원을 새로 열어놨는지, 우리는 분명한데 또 마구 뒤섞고, 그렇게 포개졌는데 또 이 순간 하나로만 있는 거다. 불운한 사건은 그 자체로는 아직 꿈속에서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날 때 실재적인 스토리가 생성된다. 스토리라고 할까, 새로운 목소리 하나가 삶에 덧입혀진다.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혼란이 아니라 일종의 허밍음 같은 고백이다. 목소리 하나가 우리를 위해 노래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 그것은 결코 순서대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따로따로 이루어졌던 모든 행동들이 갑자기 같은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다.
첫 번째의 가장 무거운 사건, '모자의 상실'이 일어난 곳에서 우리는 얼마나 당혹스럽고 참담했었는가? 그리고 같은 곳을 의도치 않게 아무렇지도 않은 곳이 되었음을 밝히고 또 밟고 있는가? 바람이 많이 불었던 날이라고, 첫 번째의 아라뱃길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그리고 그날 효진은 부득이 모자를 벗어 손에 들었다. 효진이 맨 배낭은 암벽 타기에 최적화되어 있기는 했지만 여행자에게는 그 쓰임새가 투박하고 체계랄 게 없는 모양새였다. 인체공학적으로 완벽한 형태에는 그것 빼고는 다 추방하겠다는 허영심이 깃들어 있었다.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다른 후보를 마련해놓지도 않았다. 예산에 맞추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도 아니었고, 타협 없이 맹렬하게 끌고 간 감수성의 결과도 아니었으며, 숱한 발품 끝에 얻어진 각박한 현실도 아니었다. 필요한 직원을 채용하는 일은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일종의 무력함이었다. 어쩌면 고고한 거지인 우리의 선택은, 협소한 선택 속에 갇힌 우리의 헛된 자랑, 하늘에 모든 합리성을 맡겨놨다는 오만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응당 '운명적인지라 완벽할 것임에 틀림없는' 가방에는 외측의 사방 어디에도 주머니가 달려 있지 않아서 손에 들게 된 소지품을 직관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방편이란 없었다. 없는 방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소유주의 기질 면에서가 더 심각하다. 가방 주인은 진작에 이 불편함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수치심을 품고, 심려까지 불사하며, 몇 차례의 시험적인 국면을 맞닥뜨린 후 후회와 해결에 안성맞춤인 사안으로 올린 적이 없었다. 방황하는 손에 잡힌 처치 곤란한 소지품들의 목숨이 무사히 붙어 있던 경우는 이제껏 얼마나 되었었는가? 모자를 들고 걸어야 하는 사정은 오늘로써 몇 번째의 불편이었는가? 아니면 그러쥔 채 맘껏 돌아다녀 놓고 딱히 불편하다고 느낀 적도 없었는가? 이 모든 것을 이제 와서 기억하고 회상할 수는 없다. 어차피 사려된 적 없는 사안이 표명하는 성공, 혹은 다행스러운 결과는 단지 우연한 도피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련하게, 그리고 위협적으로, 가방의 의욕이 잠잠한 날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라. 고집도 맹목도 없이, 22리터의 드넓은 공간은 어찌 작은 모자 하나를 품어 주지 못하는지. 다소곳하고 점잖은 날에는 문제도 아니었던 것, 세찬 바람, 도망가려는 모자, 당황하는 마음, 게으른 손, 등에 붙은 무용한 공간, 고집도 맹목도 물론 악의도 없이, 단지 그뿐이었던 것. 예컨대 방랑자란 그런 존재인 것이다. 일사불란한 발을 멈춰 세우려고, 가방을 땅에 내려놓으려고, 지퍼를 열려고, 모자 자리를 찾으려고, 고이 말아 넣으려고, 지퍼를 닫으려고, 다시 들어 올려 어깨에 장착시키려고, 멎은 발이 재시동을 걸려고 소비하는 모든 저항성을 잠재우며 바짝 조여진 날렵한 신경이 끔뻑 죽는 실천만이 모범적이리라는 사실을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걸 미처 몰랐던 존재. 알았다면 그가 지금 떠돌고 있었겠는가. 모범 문제를 따지려거든 더 위에서, 더 달콤한 곳에서, 더 팽팽하게, 끝없이 발의될 수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자는 한참 더 우리와 함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