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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nie et Travis Oct 27. 2024

경인아라뱃길

10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금방이라도 찾아올 것 같은 상실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별 직전의 몰입을 통해 계속 복구되고 지연되었다. 다리가 조금씩 피로해지고, 처음으로 앉을 만한 장소가 나타났다고 느꼈을 때, 오솔길이 화살표 머리처럼 퍼지는 광장이란 너무 살갑고 평범해서 갑자기 바람이 조용해지길 기대했을 때, 응당 전통적인 공원마다 고요하고 영롱한 양지를 수놓던 저 정자에 앉아 한 사람은 지도를 보고 한 사람은 사진을 찍었을 때, 그 옵스큐라의 반영구적인 증거물에는 무릎에 수줍게 안긴 모자의 자태가 남겨졌으니. 실제의 현실을 양화와 음화의 상으로 붙잡아 두면 갖은 무방비 뒤에도 그 모습 그대로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마치 헤어지기로 정해진 운명을 상쇄할 약속을 받아낸 것처럼, 그 빛나는 약속에 이끌려 불충의 꺼림칙함은 완화되다 못해 일시적으로 권능을 얻었으니, 권능이 불운과 완벽히 다를 바 없을 결정적인 순간이 도래하기까지, 나중에 뜻밖에 강조될 박탈감을 보증해 두려고, 그 자유롭지 못한 손으로 못 하는 것이 없게 되었다. 모자를 쥔 확고한 손은 계속해서 삶을 즐겼다. 세 종류의 나팔꽃 사이를 유희했다. 스칼렛의 중심부로 빨려 들어가는 파우더 핑크, 희노랗게 탈색된 세잎클로버를 융합한 팬지, 그리고 고딕 예배당의 방사형 기류에 감금당한 디디우스 몰포나비의 떨림은 유난히 비디오 박제로. 매점을 지나면서 젤리와 스낵을 챙겨 먹었다. 내가 지속적인 강풍에 추위에 떨까 봐 출발길에 그 자신의 것으로 구매한 긴소매 티셔츠를 내주어 나의 환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 손에는 모자가 있었겠지. 그 죄 없는 손에, 이미 탈피한 앎의 예전 껍데기에,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다채로운 것들에 대해 느끼는 당연히 느끼는 영구한 감각대로 — 아직은 갈라놓을 수 없었던 권리의 반영에, 그때까지는 모자가 있었겠지. 

  해가 기울어 높게 경사진 수풀 뒤로 들어갔다. 우리는 불안과 교차하며 그 떨림에 비례하는 기쁨으로 나아갔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기약된 것이 없었기에 끝도 아직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해가 완전히 져 버리기 전에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굳이 검암역이라는 목적지를 표명하지 않아도 모종의 도착은 긍정되리라. 언젠가, 다시 말하면 곧, 게다가 흔히 상식적으로 도착해 버릴 나그네의 낯설고 감상적인 격양은 안도감과 적막감 양극을 서서히 이동하는 추의 어떤 지점에 의해 찰나 명백해졌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그저 첫 번째의 끝에 불과하다고 마음을 달랜다. 그런 반짝거리는 작은 위안으로, 어스름한 길가에서 코발트 빛 제비꽃들을 알아본다. 말라가는 모래톱처럼 갈라진 도보의 청록빛 균열을 따라 차기의 빛을, 두 번째, 세 번째, 다음 몇 번째의 태양을, 한낮의 귀환을, 백색의 지복을 흘려 넣고자 한다. 수상한 절벽과 나란히 어둠을 지어놓은 언덕의 잡초 가득한 꼭대기에 더 수상한 우주선처럼 원고리형의 통로가 서 있다. 우리가 하늘에 둥글게 진 저 인공적인 얼룩에서 무엇을 하고, 또 저기를 어디에서 어떻게 왜 들어서게 될까. 그 누구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계시를 기다린다. 또한 마찬가지로 인공적일, 우람한 절벽에서 하찮은 눈물이 새어 벽을 따라 흐른다. 그 물은 천연의 것일까? 땅거미가 진 곳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아이러니하지만, 여기 존재하는 것 중 유일하게 사라질 부분이다. 아이러니 위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끝의 실체가 금방 만들어진 것처럼 터져 나온다. 길의 끝이 아닌 우리의 끝, 세상의 끝이 아닌 하루의 끝. 바다를 서술했을 저 진짜 끝은 '오늘은 아무도 없네'라고 독백하며 붕괴된다. 종언은 애처로움과 항의 — 애걸로 변하기도 하며, 그런데 무엇보다 우리는 행복하다, 참고로 이것은 아직까지는 여전히 모자와 함께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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