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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버거를 극히 성공적으로 취식한 만족감은 이상하게 맥이 풀린 채, 끝을 향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려는 듯한 추세를 보였고, 실제로 대개의 최후가 작용하는 방식을 지키며 — 희미한 파편으로 조각남으로써 — 떠나 버린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를 거부하지 않고 먼 곳을 바라보거나 입맛을 다시면서 다르게 전환될 수 있는 모든 마지막을 환영했다. 우리는 온갖 명제에서 갑자기 달라지는 인간에 속했으나 그것은 공허한 방식이 아니라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 방식이다. 다시 걸으라면 걸을 수도 있고, 더 먹으라면 먹을 수도 있다. 천사들은 세상을 통해 우리더러 어떤 식으로 움직이라고 무엇이라도 시킬 수 있다. 그때 알게 된 것이 에그타르트였다. 첫 번째의 출발로부터 7시간가량이나 지나 각자에게 한 개씩이나 배당되어 아주 호화로운 에그타르트. 끝과 출발이 중첩된 데칼코마니의 가장 안쪽에서 피어난 이것에 관해 이제는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확대하여 논쟁을 할 필요가 있다. 데칼코마니가 우리들의 정신에 태양처럼 떠올랐다 불필요해지기까지 의식의 저변에서 지배력을 가졌던 그 상징물. 그 죽도록 맛난 파멸의 그릇. 매혹이자 먼지. 방관이자 요구. 잊어도 되는 것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의 중간 지대에서 부유하는 요정. 두 번째의 출발에서 우리들의 발이 이 요정의 엉덩이를 걷어차 버렸다면 그전까지 손으로는 몰로이의 주머니 속 조약돌처럼 요정을 갖고 놀려는 발상의 날도 필요하다. 그리하여 바로 이 첫 번째의 마지막에서 천사들은 우리에게 이것을 보낸 것이다.
개찰구를 들어서자마자 늦은 시간에도 영업을 불사하는 디저트 가게가 보이고, 느닷없이 그것에 다가가는 이 상태는 얼마나 자연스럽고 합당한가. 이는 천사들의 노랫소리에 의거했으니, 아직 노래가 아니라면 적어도 한 줄기 영적 고주파에 해당했으니, 우리가 자기 자신을 결코 구원할 수 없는 것과 똑같이, 챙이 넓게 너울지고, 물 빠진 세련된 블랙에, 너무나 조심스럽게 두상을 감싸 간접적으로 충성하고, 한 마디로 유용하기 그지없는 언더아머 모자를 영영 구해낼 수 없는 그 시나리오가 이미 정신학적으로, 물리학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확신한다. 이번 시나리오의 원초적인 시퀀스는 다가가느냐 마느냐, 먹느냐 마느냐다. 다만 배우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일단 고뇌보다는 주목이 앞섰고, 주목보다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확인이 앞섰다. 우리는 이 단순 확인에 대하여 욕망과 실현의 인과율적인 차등을 말소시키는 무작위표본으로 간주했다. 디저트 가게 따위 세상에 얼마나 차고 넘칠지 선제적으로 신물이 나는바, 알 수 없는 이유로 확인된 것이라면 실상 확인될 수 없는 것이며, 욕망 단계와 실현 단계 어느 쪽도 양비론 없이는 자생하지 못하며 — 마치 존재의 부정을 맞닥뜨리고 나서야 비로소 맥이 뛰는 심장과 같이 — , 어차피 우리 차원에서 인과율에 대한 존중은 반드시 오작동한다. 그 사이 우리 둘 다 공중화장실을 향했다. 내가 볼 일 보고 나왔을 때 모자 주인은 저 멀리, 말하자면 디저트 가게의 유리창 너머 진열장에 착 붙어 있었다.
오 무작위표본에 금이 간 것이다. 천사의 노래는 시작된 것이다. 에그타르트는 존재했던 것이다. 금욕과도 같은 무위 속에서 달달한 식욕은 수태되었던 것이다. 첫 번째의 마지막은 기어코 변경된 것이다.
오 모자는 상실된 것이다.
화장실 입구와 유리 진열장에서, 우리는 서로를 향해 동시에 출발했다. 모자 주인은 저곳에 얼마나 그럴듯한 형세의 에그타르트가 탄생되었는지를 알렸다. 그것은 성북동의 그것과 견줄만하다고 했다. 가게에 입성해서, 인당 분배량을 만족시키는 에그타르트에 관하여 조언하는 성북동 에그타르트의 실증에 힘입어 두 개 값을 지불했다.
오늘 거의 씻은 적이 없는 불결한 각자의 손에 소중한 결말을 들고 플랫폼으로 올라가자마자 열차가 들어온다. 늦은 밤 열차칸은 한산하다. 통째로 비어있는 긴 좌석에 붙어 앉아 허겁지겁 먹는다. 열광한다. 성북동 언저리로 튀어 오른 좋은 맛과, 으슥한 시간대와, 아직은 나른한 소란처럼 다가온 이 말미의 낭만에. 그리고 모자 주인의 손에는 더 이상 모자가 들려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