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가계부는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24년 가계부 실전후기#정독도서관#책 속의 길#평온의 기도#심리보고서

by 두번째지니

[14화] 우리가 진짜 바꿔야 할 것들 : 11월의 가방과 평온의 기도


분류기호: 595.3 (생활과학 - 소비 생활 및 소비자 심리)


13화를 읽으신 분들 중에는 아마 이런 생각을 하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뭐야, 결국 좋은 시절에 테슬라랑 엔비디아 사서 대박 났다는 얘기네."

"유산으로 받은 여윳돈 1억 5천만 원이 있었으니까 맘 편히 버틴 거지."


네. 절반은 맞는 이야기입니다.


1화부터 계속 읽으신 분들조차, 지난 글에서는 저의 치열했던 기록보다 '테슬라'와 '엔비디아'라는 화려한 단어만 머릿속에 남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요? 저 역시 누군가의 성공기(?)를 볼 때면, 그 사람의 피나는 노력보다는 '내게는 없는 것(돈, 배경, 운)'만 기가 막히게 찾아내어 기억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내가 저런 상황이면 더 잘했겠다!"

”시작을 저렇게 하고 10억 못 모으면 바보지! “

"출발선이 너~무 다른데 노력만 가지고 뭘 할 수 있겠어!"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보면 배우고 따라 하기보다, 어떻게든 흠을 잡아 저와 비슷한 수준으로 끌어내려 제 알량한 자아를 보호하는 자존감 낮은 사람이었습니다.

‘잘 되면 제 탓, 안 되면 조상 탓’하는 사람이기도 했고요.

솔직히 지금도 불쑥불쑥 올라오는 그 못난 마음들을 매일 다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전보다 아주 조금, 마음을 다스리는 요령이 생겼다는 것 정도가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랄까요.


정독도서관으로 향한 날

신혼 초, 남편의 퇴근은 늦을 때가 많았고 저는 13평 남짓한 어두운 전셋집에서 혼자 괴로워했습니다.

1,500만 원이라는 빚의 압박감에 시댁과의 갈등까지 겹쳐, 제20대 후반은 그야말로 암울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민들레 영토'를 만든 지승룡 대표님의 이야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이혼을 하고 가장 암울했던 시절, 매일 '정독도서관'으로 출근해 하루 종일 책을 읽으며 '민들레 영토'를 구상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


저도 '길'을 찾아보려고 무작정 정독도서관을 찾아갔습니다.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안국역에서 정독도서관으로 걸어 올라가는 그 길부터 참 다정하고 예뻐요. 지금은 서울공예박물관과 열린송현녹지광장까지 생겨서 걷기에 훨씬 더 좋아졌죠. 드라마 <도깨비>에서도 예쁘게 나왔죠.

과거 경기고등학교 부지에 1977년 개관한 정독도서관은 4월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명소이기도 합니다. 학교 운동장이 공원으로 바뀌어서 책을 읽기 딱 좋은 곳이지요.


처음 그곳에 발을 들인 날부터, 저는 정독도서관과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오래된 서가 사이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뾰족했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에너지가 충전되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세상에서 교통비 쓰는 걸 제일 아까워하던 제가, 새절역에서 안국역까지 가는 지하철 요금만큼은 단돈 10원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훗날 아들이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한 달에 최소 한 번은 꼭 아이 손을 잡고 도서관으로 즐거운 소풍을 갔어요.

그렇게 도서관을 오가며 책을 읽던 어느 날, 저는 한 권의 책에서 제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준 기도문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의 〈평온의 기도〉입니다.


"신이시여,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 둘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그토록 암울하고 괴로웠던 이유는, 시부모님이나 남편의 월급처럼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억지로 바꾸려 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온전히 통제하고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신'뿐인데, 나는 가만히 있으면서 주변 상황이 기적처럼 싹 변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겁니다.


그날 이후 저는 불평을 멈추고, 오직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실천의 첫걸음이자 가장 강력한 도구가 바로 가계부였습니다.


그렇게 매일 나 자신을 마주하며 써 내려간 가계부가 어느덧 24권이 되었습니다.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 가계부 쓰기를 권하면, 열에 아홉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월급이 너무 뻔해서 쓸 게 없어."

"돈이 있어야 가계부를 쓰지. “

“쓰고 말고 할 게 없어~”


사실 가계부는 '기록할 돈이 없는 사람'일수록 반드시 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일수록 기록을 시작했을 때 나타나는 삶의 변화가 가장 극적이거든요.


2017년 KBS 예능 프로그램 <김생민의 영수증>을 기억하시나요? 시청자들의 한 달 치 영수증을 낱낱이 분석해서 '스튜핏(후회되는 소비)'과 '그뤠잇(잘한 소비)'을 가려내던 그 방송을 보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 내가 매일 집에서 가계부 펴놓고 혼자 하던 짓인데?'


11월의 가방

저는 매월 1일이 되면 작년도 가계부의 같은 달 페이지를 펼쳐봅니다. 작년 이맘때 어떤 이벤트와 지출이 있었는지 미리 살펴보고 이번 달 예산을 단속하기 위해서죠. 이 작업을 십수 년째 반복하다 보면, 소름 돋게도 저만의 '소비 심리 패턴'이 보입니다.


하루는 가계부를 쭉 넘겨보는데, 유난히 매년 11월만 되면 제가 '가방'을 샀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도대체 왜 나는 11월에만 가방에 돈을 쓸까?'


곰곰이 제 마음을 들여다보니 이유를 알겠더군요. 저는 11월을 참 싫어합니다.

10월까지는 단풍도 예쁘고 가을 정취가 좋은데, 11월이 되면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아, 일 년이 벌써 다 갔구나. 올해 나는 대체 뭘 했지?' 하는 헛헛함과 지키지 못한 새해 계획들이 떠오르며 우울감이 밀려왔던 겁니다.


결국 11월의 가방 지출은, 제 계절성 우울함을 달래기 위한 '감정적 소비' 였던 셈입니다.

가계부는 단순한 기록이 아닙니다. 내가 언제 우울한지, 무엇에 기뻐하는지, 어떤 것에 가치를 두는 사람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나에 대한 가장 완벽한 심리 보고서'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

지금 브런치에 제 치열하고도 찌질했던(?) 24년의 이야기를 부끄러움 없이 연재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딱 5년 뒤, 이곳 브런치에서 누군가의 이런 글을 발견하는 것이 제 작은 소원이거든요.


"가계부 기록 5년, 나의 삶은 이렇게 완벽하게 바뀌어 가고 있다."


저의 이야기에서 1억 5천만 원의 유산이나 엔비디아의 수익률 같은 '여러분이 바꿀 수 없는 것' 들은 과감히 잊어주세요.


대신, 677원의 이자를 깎기 위해 은행에 전화를 걸고 [2화], 11월의 우울함을 깨닫고 지갑을 닫았던 저의 그 '바꿀 수 있는 용기' 에만 집중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에 에너지를 쏟으면 인생은 영원히 도돌이표지만, 내가 바꿀 수 있는 작은 숫자에 집중하면 인생은 반드시 우상향 한다는 것.


제가 제 인생 24년으로 직접 증명해 봤으니, 믿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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